G20 불참 선언한 미국·아르헨…다자외교 흔들
“국제공조보다 정치연대 선택”
글로벌사우스 주최 회의 외면
이념대립으로 신냉전 우려
오는 22일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시작도 전에 파열음을 내고 있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정상이 잇따라 불참을 선언하면서 세계 경제 및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다자 협의체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남아공에서 G20 회의가 열리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며 올해 회의에 미국 고위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네덜란드계 백인 정착민 후손인 아프리카너 공동체가 남아공에서 토지 몰수와 폭력의 피해를 입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남아공의 G20 자격 자체를 문제 삼았다. 심지어 “남아공은 더 이상 G그룹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G20 탈퇴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남아공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아프리카너가 박해받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며 “남아공은 인종과 민족적 분열을 극복한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G20 내에서 연대의 미래를 이끌 독보적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 역시 12일 케이프타운 의회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G20에 불참한다면 결국 손해를 입는 쪽은 그들 자신”이라며 “세계 최대 경제국으로서 미국은 중요한 국제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아르헨티나도 미국의 뒤를 따랐다. 같은 날 아르헨티나 언론 라나시온, 페르필 등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G20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파블로 키르노 외교부 장관이 대신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실은 불참 이유를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현지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불참과 밀레이 대통령의 정치적 유대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는 밀레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트럼프와의 외교적 연대를 과시해왔으며 미국을 자주 방문해 트럼프 측근들과 접촉해 왔다. 일부에서는 ‘트럼프 특사 같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밀레이 대통령의 불참은 내부에서도 갑작스럽게 결정된 것으로 전해졌다. 아르헨티나 일간지 페르필은 “정부 실무진이 회의 참석을 전제로 사전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며 “밀레이 대통령의 돌연한 불참은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로 G20이라는 다자외교 무대에서 주요국 간 정치적 편향과 균열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미국과 서방 주도의 패권 구도에 반감이 큰 글로벌 사우스 국가가 주도하는 회의에 미국과 우방이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모습은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형태의 블록화와 이념 대립을 보여주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올해 G20 정상회의는 남아공이 의장국을 맡아 ‘연대, 평등,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한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목소리를 반영하고자 한 시도로 풀이되지만 미국은 이를 ‘반미주의’로 규정하며 회의 자체를 문제 삼았다. 아르헨티나 역시 기후 위기 대응을 논의하는 제30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에도 소규모 대표단만 파견하는 등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향후 글로벌 거버넌스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요국 지도자 간의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연대에 따라 외교 정책이 좌우되는 ‘개인주의 외교’가 다자외교의 효용성을 약화하고 세계적 문제 해결의 협력 기반마저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G20은 1999년 창설된 이래 세계 GDP의 85%, 인구의 약 3분의 2를 대표하는 19개국과 유럽연합(EU), 아프리카연합(AU)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핵심 회원국의 연쇄 불참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을 맞으면서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