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배풍등(排風藤)에서 감자까지 가짓과 식물들의 진화
날이 제법 춥다. 장갑 낀 양손을 웃옷 주머니에 넣은 채 종종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배풍등(排風藤)을 향한다. 가운데께로 푸른 빛 절반, 가장자리로는 짙은 갈색 절반쯤이라 가지에 달린 몇 개의 배풍등 잎은 막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서는 북반구 온대지방의 날씨를 닮았다.
풍(風)을 쫓는 효능이 있다는 이 식물을 영어로는 리라(lyre) 닮은 잎을 가진 ‘밤그늘(nightshade)’이라 부른다. 리라는 한쪽 끝이 백자 손잡이 흡사한 현악기를, 밤그늘은 밤에 독성을 띠는 열매의 특성을 빌어 지은 이름이다. 대체로 밤그늘은 감자나 토마토 가지 등 가짓과 식물을 가리키지만, 때마침 까만 열매를 단 까마중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필자에게 올 한해는 배풍등을 처음 보고 그 이름을 찾고 더운 여름 지나 맺은 푸른 열매가 오롯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느라 다 지나갔다. 이른 봄 배풍등 잎을 처음 보았을 때는 뒤늦게 나팔꽃 잎 모양을 떠올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식물의 이름을 유추할 수 없어 꽃 피기를 기다렸다.
유월 지나 핀 다섯 잎 하얀 꽃은 놀랍게도 까마중 꽃과 똑같이 생겼었다. 까마중 소속인 가짓과로 범위가 좁혀진 뒤에 배풍등을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 뒤 이 덩굴식물은 이삿짐 트럭 바퀴에 일부 짓밟히기도 했지만 담을 따라 덩굴을 더 높이 올린 다음 마침내 앙증맞고 완벽한 원형의 푸른 열매를 맺었다.
95개 속 2300종의 가짓과 식물 군(群)
어느해 한창 더운 여름날, 감자가 고대의 야생 토마토에서 진화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먹는 하지감자의 유래가 900만년이나 되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약 100종이 넘는 야생감자의 조상님 함자는 에투베로숨(Etuberosum)이다. 점차 날씨가 추워지던 마이오세 중기에 에투베로숨은 우연히 이웃하던 토마토의 꽃가루를 받아들이고 광합성 산물인 포도당을 안전하게 땅속에 묻는 혁신전략을 손에 넣게 되었다. 아마도 꿀벌이 이 두 식물의 랑데뷰를 성사시켰을 것이다.
사실 토마토와 에투베로숨은 사촌 식물이다. 그러므로 감자는 1400만년 전의 조상에서 두 계열로 나뉜 친척이 만나 화려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땅에 열매를 묻고 그 열매로 유전자를 퍼뜨린 감자는 100종 넘게 세를 키웠지만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에투베로숨은 지구상에 단 세 종류밖에 없다.
여태까지 언급한 가짓과(Solanaceae) 식물은 95개 속에 약 2300종이 넘는 거대 군(群)에 속한다. 유전체를 분석하여 밝힌 계통수를 우리가 아는 식물로 하나씩 나열해보자. 짐작하다시피 감자와 토마토가 그리 멀지 않은 최근에 분기했고 그들 조상은 가지, 고추와 가깝다. 그들은 다시 ‘가짓과 나무’인 구기자와 친척을 이룬다. 그보다 촌수가 더 먼 식물은 담배와 관상용으로 널리 알려진 피튜니아다.
필자는 구기자의 간세포 보호 성분을 분리하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덕분에 청양군의 초청을 받아 얼떨결에 강의도 했고 구기자로 만든 한과도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2021년 중국의 연구진은 몇 종류의 구기자 유전체를 분석하고 그들이 토마토 같은 가짓과 친척식물과 달리 리그닌을 합성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리그닌은 식물을 우뚝 서도록 강직함을 부여하는 화합물이다.
초식성 식물이 대세인 가짓과 집단에서 구기자가 리그닌 유전자를 얻게 된 까닭은 이들이 원산지인 중국의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리그닌은 식물을 웃자라게 할 뿐만 아니라 병원균 공격을 막는 기계적 장벽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증산 작용을 줄여 물을 아낄 수 있게 돕는 물리·화학적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구기자와 배풍등은 친척식물
세계 각지에 분포하는 구기자나무는 원산지인 아프리카를 떠난 인류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듯 아시아로, 베링해를 건너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그러다 씨앗 한 알이 툭 떨어져 서울 한복판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어느 늦은 가을날 필자는 성북동 길상사 안뜰에서 구기자를 발견하고 무릎을 구부렸다. 어린 날 보았던 구기자의 낭창낭창한 줄기에 붉고 기다란 열매를 거기서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강렬한 기억은 좀체 지워지지 않아서 지금도 그 광경을 떠올리면 설레는 마음이 든다.
길상사에 못 가는 대신 지금은 수원의 어느 골목, 담벼락과 길거리 시멘트 사이 자투리 공간에 리그닌이 풍부한 거친 뿌리를 내리고, 나무도 풀도 아닌 덩굴로 남아 위아래로 붉은 열매를 두어개씩 매단 배풍등을 바라볼 뿐이다.
겨울이 다가오는 속도가 자못 빨라진다면 곧 눈도 내릴 것이다. 흰 눈 속에서 부진부진 얼굴을 내민 키 작은 나무의 붉은 열매를 보면 애잔하다. 남천과 산수유, 산사나무처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오가는 사람 빈번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배풍등 오련 붉은 작은 열매를 보며 삭풍을 몰고 올 올겨울을 기다려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