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니냐와 인도양 쌍극자의 이례적 결합
동남아 압도한 ‘습기 엔진’
기록적 폭우와 홍수로 재난
2025년 가을 동남아시아는 유례없는 ‘기후 재난의 계절’을 보냈다. 베트남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기록적인 폭우와 연이은 태풍이 덮쳤다. 수백만명이 삶의 터전을 잃거나 이재민이 됐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계절성 폭우가 아니라 지구 온난화와 대기 중 수분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기후 시스템 간 충돌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폭우와 홍수의 핵심 원인은 라니냐(La Niña)와 인도양 쌍극자(Negative Indian Ocean Dipole)의 이례적 결합이다. 라니냐는 태평양 중부 해수 온도가 낮아지면서 열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그 결과 동남아 지역의 몬순이 강해지는 기후 현상이다. 반면 인도양 쌍극자는 인도네시아 인근 해역의 수온이 평년보다 높아지며 대기 중 수분을 증가시키는 현상이다. 이 두 시스템은 통상적으로 각각 다른 시기에 발생하지만 2025년에는 동시에 정점을 찍었다. 이로 인해 대기 중 수분량이 극단적으로 증가하며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습기 엔진’이 작동했다.
CNA는 26일자(현지시간) 보도에서 베트남 기상·수문·기후변화연구소 팜 티 탄 응아 소장의 말을 인용해 “여러 독립적인 강 유역에서 동시에 기록적인 홍수가 발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기상 현상”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베트남 중부에서는 흐엉강, 부자-투본강, 바강 등 주요 하천이 범람하며 약 20만 가구가 침수됐고 90명 이상이 사망했다. 특히 후에(Hue)시는 10월 말 하루 동안 1.7미터에 달하는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며 도시 전체가 마비됐다.
필리핀도 21번째 태풍인 ‘풍웡(Fung-wong)’과 그 이전 ‘칼매기(Kammuri)’의 연이은 상륙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약 150만명이 대피했고, 도로 주택 학교 등 기반시설이 대규모로 파괴됐다. 태국 남부 도시 핫야이(Hat Yai)에서는 며칠 사이 600mm 이상의 폭우가 내려 도시가 침수됐고, 재난 지역으로 선포된 송클라(Songkhla) 주를 포함해 210만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광객들이 고립되거나 대피했다.
로이터와 AP 통신은 말레이시아도 3000곳 이상의 홍수 위험 지역을 지정하고 비상 대응에 나섰다고 전했다. 트렝가누 클란탄 페낭 등 8개 주는 이미 침수 피해를 입었고, 2만5000명 이상이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사태는 단지 기후 현상의 작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각국 정부의 대응 체계 미흡과 기후 적응력 부족도 피해를 키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랑싯대학교 기후변화 및 재해 센터의 세리 수프라티드 소장은 같은 보도에서 “핫야이 홍수는 정부의 사전 대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결과”라며, “국가 재난 대응 체계가 보다 신속하고 정밀하게 작동했더라면 피해 규모는 줄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구 온난화가 기후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24 아시아 기후 현황 보고서’를 통해 “2024년은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였으며, 아시아는 전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온난화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