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기초과학과 액정 디스플레이
21세기 초, 필자가 한 디스플레이 부품 회사에 근무할 때다. 당시 회사는 시장이 커지던 액정표시장치(Liquid Crystal Display, LCD) TV의 후면에 들어가는 광원을 개발하고 있었다. TV는 보통 스크린에서 직접 빛이 만들어져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LCD는 후면에 백색광을 내는 조명장치, 즉 백라이트가 따로 들어간다. 액정 패널은 조명이 쏘아주는 빛의 투과도를 화소별로 조절하는 광스위치 역할을 할 뿐이다. 여기서 핵심적 역할은 ‘액정’이라 불리는 물질이다.
미국의 트럼프정부가 기초과학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상황에서, 한 프리랜서 작가가 혁신적 산업으로 이어진 기초과학의 다양한 성과를 소개하는 글을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었다. 그중 한 분야가 바로 액정이었다. 액정은 말 그대로 ‘액체’와 ‘결정(고체)’의 합성어다. 액체처럼 흐르는 유동성을 보이지만 결정과 비슷하게 빛의 편광을 조절하는 성질도 갖는 상이 바로 액정상이다.
오늘날 주류 디스플레이로 부상한 LCD의 핵심 소재인 액정은 언제 발견됐을까? 무려 137년 전인 1888년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이니처는 ‘콜레스테릴 벤조에이트’라는 물질을 합성한 후 가열하며 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온도가 올라가며 고체에서 액체를 거쳐 기체로 변하는 일반적인 상의 순서와 다르게 이 물질은 고체에서 탁한 액체로 변한 후에 투명한 액체로 바뀌었다.
그의 호기심은 일반적인 액체와는 성질이 다른 중간의 탁한 유체에 집중되었으나 식물학자의 지식으로 이를 정확히 파악하긴 쉽지 않았다.
기초 연구가 거대한 산업으로 변모한 사례
라이니처의 발견으로 시작된 액정 연구가 오늘날 거대한 산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면 현대적 과학연구와 산업화 과정의 중요한 요소들이 보인다. 첫번째는 국제공동연구다. 라이니처는 본인이 발견한 액정상의 물성을 정확히 연구할 수 있는 파트너로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레만을 선택한 후 자신의 시료를 그에게 보냈다. 즉 액정 분야는 그 자체로 다양한 전공의 과학자들의 국제 협업으로 탄생한 셈이다.
둘째는 첨단장비의 중요성이다. 라이니처로부터 샘플을 받은 레만은 당시로서는 첨단장비였던 가열 편광현미경을 활용해 액정의 물성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장비는 오늘날 액정을 연구하는 실험실이라면 어디나 구비하는 필수적 실험장비다. 레만의 체계적 연구로 인해 액정상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시작되었고 유럽에서 액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세번째는 새로운 개념의 수용 과정이다.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혁명적 이론과 개념들, 즉 상대성이론이나 빛의 양자란 개념이 20여 년의 기간 동안 치열한 논쟁과 정교한 실험을 거치며 서서히 수용된 것처럼, 기존의 물질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액정상의 제안은 관련 학계에 거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기존의 상 분류에 익숙한 많은 과학자들이 액정상의 존재를 부정하고 불순물에 의한 효과 등으로 반박한 것이다. 30여 년이 넘는 격렬한 논쟁과 실험을 거친 후에야 액정은 물질의 새로운 상으로 수용됐다.
흥미로운 점은 20세기 전반부 액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LCD의 요소 기술들이 대부분 연구되었다는 점이다. 즉 액정에 의한 빛의 편광 조절뿐 아니라 액정의 합성과 다양한 액정상의 분류, 오늘날 LCD에 활용되는 다양한 요소기술들이 이 시기에 연구되며 이해가 심화된 것이다.
문제는 당시 액정 연구는 흥미로운 물질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2차대전과 그후 액정 연구의 암흑기로 연결된다. 결국 액정 연구가 다시 활발해진 결정적 요인은 바로 ‘산업적 응용’의 가능성이었다.
각국 정부가 기초과학 예산을 지원하는 이유
20세기 후반, 반도체 소자의 개발로 전자 기기들이 소형화되면서 디스플레이의 소형화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1970년대 박막 트랜지스터와 같은 반도체 공정의 개발은 고속 구동이 가능한 LCD의 개발로 이어졌고, 1988년 일본의 한 전자회사가 최초로 14인치 LCD TV를 선보이며 벽걸이 TV 시대의 씨앗이 탄생했다.
오늘날 휴대폰에서 대형 TV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디스플레이에 적용되는 LCD는 한 세기에 이르는 긴 호흡을 거쳐 탄생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랜서 과학기자가 액정을 기초과학으로부터 출발해 거대 산업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로 거론한 것은 극히 당연하다. 기초과학은 특정 산업을 겨냥해 연구가 이루어지진 않지만 예측하기 힘든 미래에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것이 각국 정부가 기초과학에 꾸준히 예산을 지원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고재현
한림대학교 교수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