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개입에 무릎꿇은 미 기업들
정부가 기업경영에 개입하는 국가자본주의 … 협력 명분으로 지분·매출까지 내줘
이 같은 변화는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엔비디아는 최근 첨단 반도체 일부를 중국에 다시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그 대가로 해당 매출의 25%를 연방정부에 내야 했다. 과거에는 없던 조건이지만, 중국 시장 접근이라는 실익을 고려해 이를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중국에 판매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괜찮다”고 했다.
WSJ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방식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가 기업 지분을 보유하는 것이 “오히려 미국적인 일”이라고 말해왔다. 이는 정부가 기업을 직접 소유하지는 않지만, 강한 영향력을 통해 기업의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설명됐다.
기업들이 이 같은 환경에 공개적으로 반발하지 않는 이유도 분명하다고 신문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방향에 협조하면 관세 부담이 줄고, 규제가 완화되며, 인수합병 승인도 수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입이 부담이 되는 동시에, 기업에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제약사 화이자 사례도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 화이자는 일부 의약품 가격을 낮추고, 연방 정부가 운영하는 온라인 판매 창구 ‘트럼프Rx’를 통해 약을 공급하며, 미국 내 생산 투자도 약속했다. 그 결과 관세 부담 완화라는 혜택을 받았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는 백악관 행사에서 이 합의를 “역사적”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화이자가 비만 치료제 스타트업 메트세라 인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정책 환경이 영향을 미쳤다고 WSJ는 전했다. 외국 기업 노보 노디스크의 인수 시도에 대해 반독점 우려가 제기됐고,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문제를 제기한 뒤 메트세라는 화이자에 매각됐다.
화이자 측은 이 결정이 행정부와의 관계와는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WSJ는 인수 과정에서 정치권의 문제 제기와 규제 당국의 움직임이 맞물려 전개됐다고 전했다.
국가 자본주의가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로는 인공지능(AI)이 꼽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실리콘밸리는 AI 경쟁이 미국의 경제 성장과 안보에 핵심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오픈AI·오라클·소프트뱅크가 참여하는 5000억달러 규모의 AI 인프라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WSJ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AI 산업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한 이전 행정부의 지침을 폐기하고, 전력 공급 확대와 규제 완화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핵심 기술 제품은 관세 적용에서도 상당 부분 제외됐다. 동시에 정부는 단순한 지원자를 넘어, 산업에 직접 참여하는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인텔에 대한 지원 방식 변화도 이런 흐름의 일부로 소개됐다. 정부는 보조금 대신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지원했고, 기존 주주 가치 희석 우려에도 인텔 주가는 상승했다. 투자자들은 정부가 인텔을 전략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했다는 설명이다.
WSJ는 이런 구조가 위험을 동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수익 추구가 국가안보 목표를 흐릴 수 있고, 특정 기업에 대한 혜택이 지나치면 연고 자본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지나 레이먼도 전 상무장관은 “정부가 돈을 벌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WSJ는 국가 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나라들에서는 정부와 가까운 자본이 시장을 좌우하게 됐다고 전했다. 미국에서도 시장과 국가 중 누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두번째 임기 들어 기업들이 정부와의 관계를 중요한 경영 변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고 덧붙였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