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북핵 문제 비공개 접촉
북러 밀착 속 외교전
러, 공식적으론 부인
정부가 최근 러시아와 비공개로 접촉해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 관련 현안을 논의한 사실이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외교부의 북핵 담당 고위 당국자가 모스크바를 방문해 올레그 부르미스트로프 러시아 외무부 북핵담당 특임대사와 면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북한의 러시아 파병 이후 나빠졌던 한러 관계 속에서 북핵 문제를 둘러싼 양국 당국자의 첫 공식 접촉으로 한반도 정세에 변화가 시작될 조짐으로 해석된다.
한국은 내년부터 남북 대화 재개와 평화 프로세스 본격화를 예고하고 있어 러시아의 ‘건설적 역할’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북한이 최근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만큼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러시아와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북한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온 러시아가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열쇠를 쥐고 있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이번 접촉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논의가 국제사회에서 본격화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한러 간 북핵 협의는 향후 전쟁 종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지형의 변화를 준비하는 사전 포석일 수 있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 역시 북한과의 관계만으로는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북한도 러시아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미국 한국 등과의 대화 가능성을 다시 타진할 여지가 있다. 결국 한러 양측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동북아 정세 재편에 대한 의견 교환이 필요했던 셈이다.
외교부는 지난 1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이러한 흐름을 공식적으로 반영했다. 보고 내용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가능성과 관련한 국익 증진 방안”이 포함됐으며 “한러 관계 복원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 관련 러측의 건설적 역할을 견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한 북러 간 군사 협력 중단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방침도 명시됐다.
특히 한국은 북러 간 무기 거래와 기술 협력 등 군사적 밀착이 자칫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에 우려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는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개입에 대한 대가로 재래식 무기와 군사 기술 협력을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한미일 공조 강화와 더불어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에서 민감하게 다뤄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번 한러 접촉설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한국과 어떤 협의도 진행하지 않았다”며 “북핵 문제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는 주제”라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보도는 “러북 간 전략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시도”라며 “러시아와 북한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헛된 노력”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러시아는 북한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잊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과의 협력은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의 이같은 반응은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정치적 메시지로 풀이된다. 공개적 대화 사실 인정은 북러 협력에 금이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접촉이 있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이 러시아와의 외교 채널을 다시 가동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이는 동북아 안보 환경이 다시 요동칠 수 있는 전환점에서 한국이 다자 외교를 통해 한반도 평화 구상에 속도를 내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