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각광받는 미국 직업기술 고교

2025-12-30 13:00:01 게재

대기자 수천명 … Z세대, 대학 대신 전문기술 선택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등학교는 이른바 ‘명문대 진학고’가 아니라 직업계 고등학교다. 전기 배선, 자동차 수리, 배관, 수의 보조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들에 입학하려는 대기자가 수천명에 이르면서 추첨제로 학생을 뽑을 정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7일(현지시간) 보도한 바에 따르면 매사추세츠 직업계 고교의 학생 수는 2011~2012학년도 이후 약 25% 늘었다. 주 전역에서 입학 대기자는 5000명에서 많게는 10000명에 달한다. 우스터 공업고의 경우 최근 몇 년간 대기자만 600~800명에 이른다.

이 학교들의 인기 배경에는 기술을 먼저 익힌 뒤 대학으로 진학하는 새로운 경로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매사추세츠 직업계 고교 졸업생의 3분의2는 대학이나 전문대 등 고등교육 과정으로 진학한다. 학생들은 기술을 ‘대안’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본다.

우스터 공업고 수석 졸업생이었던 펀비 파토케는 고교 재학 중 간호조무사 자격을 취득한 뒤 현재 매사추세츠대 애머스트 캠퍼스에서 의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WSJ에 “우스터는 요즘 ‘꼭 가고 싶은 학교’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배관을 전공한 학생이 사업 운영을 배우기 위해 전문대로 진학하거나, 수의 보조 과정을 밟으며 수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때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가는 곳으로 여겨졌던 직업계 고교에 대한 인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1990~2000년대만 해도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던 학교들이 이제는 중산층, 고소득층 가정의 자녀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학교 관계자들은 “예전에는 학생이 부모를 설득했다면, 이제는 부모와 학생이 함께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전했다.

WSJ는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인공지능(AI)이 불러온 노동시장 불안을 짚었다. 화이트칼라 일자리가 자동화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손으로 익힌 기술이 오히려 안정적인 선택으로 재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가 기술이라는 ‘확실한 전문성’을 가진 상태에서 대학 교육을 받는 것이 비용 대비 효율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 전반에서도 나타난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기사에서 Z세대 사이에서 대학 진학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으며, 기술직과 도제식 훈련에 대한 관심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2년제 직업·기술 과정 등록자는 2020년 이후 약 20% 증가했고, 도제 훈련 참가자 수는 2014년 이후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생성형 AI 도입 이후 기업들이 신입 화이트칼라 채용을 줄이는 경향을 보이면서, 대학 졸업생 상당수가 전공과 무관한 일자리에 머무는 현실도 지적했다. 반면 전기기사, 배관공, 항공정비사 같은 기술직은 학사 학위 없이도 높은 소득과 고용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WSJ는 “한때 숨겨진 선택지였던 직업교육이 이제는 공개된 경쟁의 장이 됐다”며 “기술과 학문을 나누는 경계 자체가 흐려지고 있다”고 전했다. AI 시대를 맞아 미국의 ‘명문 코스’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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