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리게스, 마두로 이후 체제 설계자였나
미국과의 ‘사전 교감’ 관측 … 신속한 태세전환과 권력이양
미국의 군사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체포돼 뉴욕 법정에 서면서 베네수엘라의 권력 공백은 전격적으로 메워졌다.
5일(현지시간) 카라카스 국회의사당에서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델시 로드리게스 대통령 권한대행은 공식적으로는 ‘헌정 질서에 따른 권한 이행’을 내세웠지만 국제 사회의 시선은 그가 이미 상당 기간 미국과 교감해 온 ‘사실상의 후계자’였다는 정황에 쏠리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취임 선서 직후 “불법적인 군사적 침략으로 국민이 겪은 고통에 슬픔을 느낀다”고 말하며 강경한 어조를 유지했다. 동시에 마두로를 여전히 “대통령”으로 호칭하며 체포를 ‘납치’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 이면에는 마두로 이후를 전제로 한 준비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돼 있었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복수의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로드리게스가 지난해부터 워싱턴과의 비공식 접촉에서 ‘과도 정부 수반’으로 상정된 인물이었다고 보도했다.
특히 그녀의 친오빠인 호르헤 로드리게스 국회의장이 미국 측과 비밀 회담을 진행하면서 마두로의 안전한 출구와 권력 이양 시나리오가 논의됐다는 전언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게스는 단순한 대체 인물이 아니라 미국이 “가장 건설적인 협상 파트너”로 평가한 핵심 축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로드리게스의 경력은 미국과의 ‘실무적 교감’을 뒷받침한다. 그는 부통령이자 석유장관으로서 셰브론(Chevron) 등 국제 에너지 기업과의 협상을 주도하며 제재 틀 안에서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협력 복원을 이끌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부터 이어진 이 협상에서 로드리게스는 이념보다 실행 가능성을 앞세운 실용주의자로 인식됐고, 워싱턴 내에서는 “베네수엘라 권력 엘리트 중 유일하게 체계적 행정 능력과 협상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가가 공유돼 왔다.
마두로 체포 직후 로드리게스의 태세 전환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는 비상 내각회의에서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은 마두로 한 명뿐”이라며 강경 발언을 이어갔지만 불과 하루 만에 영어로 된 성명을 통해 미국에 협력을 제안했다. “존중과 국제 공조의 환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메시지는 국내 강경 지지층을 의식한 정치적 수사와 대외 실용 노선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보여준다.
미국 측 반응도 이를 뒷받침한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로드리게스의 공개 발언에 대해 “국내 청중을 위한 메시지”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과거가 아니라 향후 행동으로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로드리게스 체제를 협상 가능한 상대로 인정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베네수엘라 내부에서는 이러한 ‘사전 교감’이 오히려 로드리게스의 취약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군부 실권을 쥔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국방장관과 디오스다도 카베요 내무장관 등 강경파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로드리게스가 미국과의 협력을 노골화할 경우 이들로부터 ‘배신’ 프레임이 씌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미 다음 수순을 준비하고 있다. 워싱턴은 카라카스 주재 미국 대사관 운영 재개를 위한 실무 검토에 착수했다. 2019년 이후 사실상 폐쇄됐던 대사관의 재가동 준비는 마두로 이후 체제를 ‘관리 가능한 전환’으로 보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이는 로드리게스가 단기간의 임시 관리자가 아니라 일정 기간 미국과 협력하며 질서 있는 전환을 이끌 인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델시 로드리게스의 부상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물밑에서 진행돼 온 선택의 결과에 가깝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마두로에 대한 충성을 외치고 있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이미 ‘마두로 이후 베네수엘라’를 전제로 한 대화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이중적 위치가 체제 연착륙의 열쇠가 될지 새로운 권력 투쟁의 불씨가 될지는 그의 다음 행보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