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모델 경쟁서 ‘킹메이커’로 떠오른 애플
구글 제미나이 선택하며 판 흔드는 전략 선택
애플이 인공지능(AI) 모델 개발 경쟁의 최전선에서 한발 물러서면서도, 구글과 오픈AI 사이에서 판도를 좌우하는 ‘킹메이커’로 부상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15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대규모 자체 AI 모델과 인프라 구축 경쟁에는 뛰어들지 않는 대신, 핵심 파트너를 선택해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애플은 최근 구글의 AI 모델 ‘제미나이(Gemini)’를 아이폰 기능과 음성비서 시리에 적용하기로 했다. 이 계약은 클라우드 컴퓨팅 형태로 이뤄지며, 애플이 장기간에 걸쳐 수십억달러를 구글에 지급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FT는 이 계약이 애플의 AI 행보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선택은 오픈AI에는 타격이다. 오픈AI는 2024년부터 챗GPT를 ‘애플 인텔리전스’ 기능에 통합하며 아이폰 사용자 수억명에 접근하는 통로를 기대해 왔다.
애플은 구글과의 계약이 기존 챗GPT 연동을 당장 종료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장기적으로 구글 쪽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을 보고 있다.
미국 투자사 딥워터자산운용의 진 먼스터는 “규모의 경제를 고려하면 애플이 두 개의 대형 AI 모델을 동시에 운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며 “챗GPT 통합은 점차 힘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미나이 계약의 가치를 약 50억달러로 추산했다. 또한 오픈AI가 아이폰과 경쟁할 수 있는 자체 AI 기기 개발에 나선 점도 애플이 구글과 손잡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애플의 이번 행보는 AI 투자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상징한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AI 투자를 “대폭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애플의 설비투자 규모는 지난 5년간 매출의 약 3% 수준에 머물렀다.
2025회계연도 기준 애플의 유형자산 투자액은 127억달러로, 같은 기간 구글이 투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약 900억달러와 큰 차이를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 역시 챗GPT 등장 이후 수천억달러를 AI 데이터센터에 쏟아붓고 있다.
FT는 애플의 전략을 20여 년 전 구글 검색을 아이폰 기본값으로 채택했던 결정과 비교했다. 당시 광고 수익 배분 계약은 연간 약 200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이번 제미나이 선택 역시 직접 경쟁보다 플랫폼 지배력을 활용해 수익과 영향력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계산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우려도 있다. 애플의 AI 투자 부족을 걱정하는 투자자들은 시리 개편 지연과 초기 기능 오류를 지적해 왔다. 애플은 기기 내에서 작동하는 소형 모델과 보안에 초점을 맞춘 ‘프라이빗 클라우드 컴퓨팅’ 환경을 구축하고 있지만, 대규모 범용 모델 경쟁에서는 뒤처졌다는 평가다. 핵심 AI 인력 일부가 메타 등 경쟁사로 이탈한 점도 부담이다.
그럼에도 애플 주가는 아이폰17 흥행과 미국 관세 위험 완화 속에 최근 1년간 12% 넘게 올랐다. FT는 “애플은 막대한 자본을 태우는 AI 군비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도, 누구의 모델이 아이폰을 통해 대중화될지를 결정하는 위치에 섰다”며 “AI 시대의 주도권을 다른 방식으로 행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