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적 야망” 트럼프 성토장 된 다보스 포럼
그린란드 관세 위협에 격앙
미국 “히스테리 진정하라”
유럽 각국 정상들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그린란드 병합 구상과 이를 둘러싼 관세 압박을 강하게 비판하며 집단 성토에 나섰다. 그동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해 온 유럽 지도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유사한 언어를 공개적으로 꺼낸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다보스 연설에서 “미국이, 용납할 수 없는 관세를 영토 주권에 대한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그는 “국제법이 무시되는 법치 없는 세계로 치닫고 있다”며 “세계 곳곳에서 다시 제국주의적 야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미국의 압박이 단순한 통상 분쟁이 아니라 국제 질서 전반을 흔드는 사안이라는 인식이 깔린 발언이다.
유럽 내부의 문제의식은 패널 토론에서도 드러났다. 바르트 더베버르 벨기에 총리는 “우리는 함께 서거나 분열될 것”이라며 “분열된다면 80년간 이어진 대서양주의 시대가 진정으로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인용해 “괴물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는 그(트럼프)가 결정할 일”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다.
유럽의 기류가 급속히 강경해진 배경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조치가 있다. 그는 지난 17일 그린란드에 연대를 표명하며 군사훈련 병력을 파견한 독일·프랑스·영국·노르웨이 등 유럽 8개국을 상대로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린란드 합병 시도에 대한 대응책을 물밑에서 조율하던 유럽에서는 이 발표를 기점으로 “타협보다 대응”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덴마크 총리를 지낸 아네르스 포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이는 나토만의 위기가 아니라 대서양 공동체 전체의 위기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트럼프가 존중하는 것은 힘과 강인함 그리고 단결뿐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며 “아첨할 때는 지났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다보스에 먼저 도착한 스콧 베센트 장관은 유럽의 반응을 “히스테리”라고 깎아내리며 “심호흡 한 번 하라”고 언급했다. 백악관 역시 관세와 그린란드 문제를 둘러싼 유럽의 강경 발언에 대해 “과도한 반응”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외교적 긴장 속에서 정상 간 신경전도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강경론을 주도하는 마크롱 대통령이 보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소셜미디어에 공개했다. 해당 메시지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22일 주요 7개국(G7) 회의를 소집할 예정이니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파리에서 만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응답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그린란드를 둘러싼 미·유럽 충돌은 다른 국제 현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초 다보스 참석이 예고됐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과 안보 보장·번영 계획안에 서명할 준비가 됐을 때만 이동하겠다”며 사실상 불참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러시아에서는 키릴 드미트리예프 특사가 다보스를 찾아 미국 측 인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