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미국투자, ‘면세혜택’ 제외될 가능성
미 국세청, 국부펀드에 과세 범위 재조정 움직임 … 구조조정과 비중조절로 대응
미국이 외국 국부펀드와 공적연기금에 적용해 온 ‘투자면세’ 원칙을 재검토하면서 국민연금의 미국투자 전략에도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고 있다. 미국 국세청(IRS)이 세법 조항의 해석 범위를 조정해 국부펀드 성격의 투자자에 대한 과세 가능성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다. 세율인상보다는 어떤 투자방식을 면세대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 변화가 핵심이다.
이 논의는 단순한 미국 세제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연금처럼 장기자금을 운용하는 공적 연기금의 경우 미국투자에서 ‘면세’가 더 이상 기본전제가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파장이 작지 않다. 세후 수익률을 전제로 설계해 온 대체투자 전략 전반을 다시 점검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논의의 출발점은 미국 세법 조항 892(Section 892)다. 이 조항은 외국 정부와 그가 통제하는 기관이 미국에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원칙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부펀드와 일부 공적연기금이 미국채와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할 때 면세혜택을 받아온 근거다. 다만 이 조항은 처음부터 무제한 면세를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공개시장에서 이뤄지는 투자활동에 한해 적용되며, 기업 운영이나 영업활동에 준하는 행위는 상업활동으로 분류돼 과세 대상이 된다는 전제가 붙어 있다.
그동안 이 기준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돼 왔다. 미국채와 회사채, 상장주식 투자는 수동적 투자로 인정돼 면세대상이 됐고, 외국 정부가 기업경영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만 예외로 취급됐다. 이 덕분에 국민연금을 포함한 주요 국부펀드들은 미국 자본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을 운용하면서도 세금 부담을 거의 지지 않았다.
달러약세·자본흐름 재조정 신호
그러나 IRS는 이 경계선을 다시 그리겠다는 입장이다. 핵심은 국부펀드가 기업에 직접 대출을 제공하거나 비상장 기업에 직접 지분을 투자하는 경우를 더 이상 단순한 투자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사모대출(private credit)과 사모투자(private equity)가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다. IRS는 투자자가 자금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출조건을 설계하거나 투자구조를 조정하고 차입 기업과 협상하는 행위는 금융업이나 경영참여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이번 해석 변경의 특징은 투자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부펀드가 금융기관처럼 반복적으로 조건을 제시하고 협상에 나서는 순간 그 행위 자체가 상업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투자 목적이 장기수익 확보에 있더라도 활동방식이 적극적이고 구조설계에 깊이 관여했다면 면세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IRS의 세법 해석이 주목받는 이유는 미국의 거시적 정책 방향과 맞닿아 있는 듯 보여서다. 최근 미국 내부에서는 달러강세가 무역적자 확대와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는 문제의식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외국자본, 특히 국부펀드 성격의 장기자금이 미국 자산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달러강세 압력이 고착화됐다는 시각이다.
이런 인식은 이른바 ‘미란 보고서(Miran Report)’를 비롯해 미국의 환율·산업·통상정책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환율목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외국 정부 성격의 자본에 대한 세제상 특혜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자본 유입 속도를 조절하고 달러강세 압력을 완화하려는 선택일 수 있다.
국부펀드와 공적연기금은 단기차익을 노리는 자금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달러자산을 축적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들의 투자환경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중장기 자본 흐름에는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사모대출과 사모투자는 공개시장이 아닌 비공개 거래를 통해 이뤄지며 자금이 장기간 묶이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영역에서 외국 정부 성격 자본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자본 유입의 ‘질’을 조정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세수확보와 함께 달러강세 완화와 자본흐름 재조정이라는 정책적 목표를 동시에 고려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세금 논의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국부펀드가 이미 미국 사모대출과 사모투자 시장의 핵심 자금 공급자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데이터업체 글로벌SWF에 따르면 전세계 사모대출 자산 가운데 약 1/4이 국부펀드와 공적연기금 등 국가 통제 투자자 손에 있다. 이 자금은 금융규제 강화로 대출을 줄인 은행의 공백을 메우며 미국 기업금융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사모대출은 구조상 유동성이 낮다. 대출만기가 길고 거래가 공개시장에서 이뤄지지 않아 중도에 현금화하기 어렵다. 경기둔화 국면에서 차입 기업의 신용도가 흔들릴 경우 자금 회수는 구조조정이나 장기협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부담이 커져 국부펀드 자금이 신규 투자에서 이탈할 경우 시장 전반의 부담은 기존 투자자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사모투자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최근 몇년간 국부펀드들은 공동투자(co-investment)를 통해 미국 비상장 기업에 대한 직접 투자를 크게 늘려 왔다. 수수료를 줄이고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었지만 그만큼 기업 매각 협의권이나 전략 변경에 대한 발언권 등 일정 수준의 권한이 수반됐다. IRS는 이러한 권한을 실질적 통제력으로 해석할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세금부담보다 예측가능성 훼손이 더 문제
이번 논의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국민연금공단은 법적으로는 연기금이지만 국제 투자시장에서는 국부펀드와 유사한 성격의 공적자금 운용 기관으로 분류된다. 글로벌 투자은행과 자문사들이 국민연금을 주요 국부펀드와 동일한 범주의 분석대상으로 삼는 이유다. 이는 미국 세법 해석 변화가 국민연금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민연금의 미국 투자 규모와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전체 자산 가운데 대체투자 비중이 15%를 웃돌고, 이중 70% 이상이 해외투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외 대체투자 규모만 150조원 안팎에 이른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사모투자 노출만 해도 최대 60조원 수준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가운데 13%는 프로젝트 형태로 투자돼 단순 펀드출자보다 투자구조에 직접 관여하는 성격이 강하다.
사모대출의 경우 국민연금은 개별 기업에 직접 대출을 제공하기보다는 펀드 출자 형태가 중심이다. 표면적으로는 수동적 투자에 가깝지만 펀드구조에 따라 대출전략이나 구조조정 과정에 일정 수준의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IRS가 투자과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해석 기준을 바꿀 경우 이러한 간접적 관여 역시 과세 논의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문제는 세금부담 자체보다 예측 가능성 훼손이다. 국민연금과 같은 장기 투자자는 투자 결정 시 세후 수익률과 비용구조를 전제로 전략을 수립한다. 미국 투자에서 면세가 더 이상 자동으로 적용되지 않는 환경이 된다면 기존 투자에 대해서도 예상하지 못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투자할지’ 묻게 만들어
이런 환경 변화는 국민연금의 미국 투자 전략의 변경을 요구한다. 가장 직접적인 대응은 투자구조 변화다. 기업에 대한 직접 대출이나 공동투자처럼 관여도가 높은 방식보다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펀드 출자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이는 세법 해석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이면서도 미국 대체투자에 대한 노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절충안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프로젝트 투자 비중 축소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나 인프라 직접투자는 구조 설계와 조건 협상 과정에서 투자자의 관여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펀드투자보다 과세위험이 상대적으로 클 수 있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미국 내 프로젝트 투자를 줄이고, 보다 간접적인 구조의 투자로 재편하는 방안이 검토대상이 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체투자 비중 자체를 조정하는 전략도 고려해야 한다. 미국 대체투자에서 세후 수익률의 불확실성이 커질 경우 상대적으로 세제환경이 명확한 지역이나 자산군으로 자금을 분산시키는 선택이 가능하다. 이는 미국 투자를 전면 축소하기보다는 위험 조정 수익률 관점에서 포트폴리오를 재균형하는 접근에 가깝다.
결국 이번 논의는 국민연금이 미국 투자에서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보다 ‘어떤 방식으로 투자할 것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면세를 전제로 한 수익계산이 더 이상 자동으로 성립하지 않는 환경에서 투자구조와 관여수준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능력이 장기 수익률을 좌우하는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다.
양현승 기자 ha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