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임금제로 건설업 정상화
‘불법 재하도급’ ‘단가 후려치기’엔 ‘적정임금제’가 특효
SH 등 다수 건설현장에서 가능성 재확인 … 발주자 직불로는 부족, ‘헛힘’ 빼지 말고 조속히 시행해야
지난 몇 년간 ‘건폭몰이’로 대표되는 국가적 횡포가 건설현장을 휩쓸면서 도급 질서는 과거로 후퇴했다. 이재명정부는 현장에 기반한 실용주의에 입각해 근본적 개혁을 내세우고 있다. 이번엔 진짜 바뀌려나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의 의지가 실무자 단계에서는 명확치 않은 듯하다. 종종 문제 상황에 대한 진단은 정확하게 하고도 그에 특효인 맞춤처방은 짐짓 비켜가려 한다. 그러니 ‘헛힘’을 쓰게 되고 현장은 달라지지 않는다. 안타깝고 초조하다.
단적인 예로 건설현장의 고질병인 산업재해와 임금체불의 원인이 ‘불법 재하도급’에 있음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하지만 처방에서는 일부 효과에 그치는 발주자 직불제만 언급하고 정작 특효를 지닌 ‘적정임금제’는 비켜갔다. 불법 재하도급을 막으려면 ‘임금 하한선 규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경기도지사 시절이던 2018년 11월 도정질의에서 김명원 건설교통위원장으로부터 적정임금제를 제안 받아 2019년 1월부터 경기도 발주공사에 도입했다. 대선공약으로 포함됐고 국정과제에도 ‘적정임금제 도입’이 명시돼 있을 정도로 시행의지가 명확하다.
하지만 실무자 단계에서는 온도차가 느껴진다. 지난해 노동부는 연구용역을 수행하면서 연구자들에게는 ‘적정임금제를 배제하고 해법을 찾아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국토교통부 역시 ‘적정임금제 제도화 방안 연구’를 발주하면서 확대 시행이 아닌 시범사업 시행방안 마련을 주문했다. 국민주권정부의 혁신정책이 ‘헛힘’을 낭비하거나 ‘지연’돼 실기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유도하는 것은 주권자의 몫이다.
#. 2018년 11월 경기도의회 도정질의에서 불법 재하도급과 임금삭감을 막을 수 있는 대책으로서 ‘적정임금제’를 도입하자는 김명원 의원의 제안에 대해 당시 이재명 도지사는 “통상 최초 발주 시 설계된 임금이 지급되지 않고 인건비를 착취하는 식으로 공사가 이뤄지는데,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게 공공영역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 제안이십니다”고 답했다. 적정임금제는 2019년 1월부터 경기도 발주공사에 대해 시행됐다.
#. 적정임금제를 시행 중인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 발주공사의 원수급자 소속 관리자는 ‘성과급제가 아닌 8시간 일급제로 인해 작업속도가 늦어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현장에서는 숙련인력 확보가 용이하고 숙련도별로 작업팀을 구분해 그것에 맞게 업무를 배분하면, 각 작업이 동시에 한층을 마무리할 수 있어 생산성 제고가 가능합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 골조공사(형틀·철근·콘크리트 등)를 담당하는 작업반장은 “이곳은 적정임금제를 시행해 임금이 높은 데다 주휴수당까지 지급돼 숙련인력 확보가 용이하고 돈내기 방식이 아닌 8시간 일급제 방식이라 노동강도도 완화돼 안전사고나 체불 걱정이 없습니다. 이 현장이 정상이고 그래야 젊은이도 오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고 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재명정부는 산업재해와 임금체불에 대한 근본적 해결에 진심이다. 고용노동부와 국토교통부가 함께 실태조사에 나섰고 산재와 체불의 주범이 건설현장의 ‘불법 재하도급’임을 제대로 짚었다. 하지만 내놓은 해법에 적정임금제는 누락돼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헛힘’을 쓰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체불·산재 원인에 대한 진단은 정확, ‘처방은 빗나가’ = 지난해 9월 관계부처합동으로 발표한 ‘임금체불 근절 대책’은 문제의 원인을 “비용 절감 목적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 만연, 특히 건설업에서는 시공팀장 재하도급 등 불법하도급에 따른 중간착취로 체불이 발생”이라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하지만 구조적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임금 구분지급, 발주자 직접지급”에 그쳤다. 하지만 이것으로 돈의 유용을 막고 전달 기간은 단축할 수 있을지언정 산재·체불의 주범인 불법 재하도급을 근절할 수는 없다.
불법 재하도급이 야기하는 폐해의 핵심은 ‘돈의 삭감’이다. 발주자가 엄격한 기준에 따라 작성한 설계금액 100원짜리가 불법 재하도급 단계마다 반복 삭감돼 50원만 남는다. 삭감된 돈에 맞추려니 억지로 비용을 줄여야 한다. 저가 자재를 쓰거나 누락시키고 고강도 장시간 노동으로 공사기간을 단축해야 하며 부당한 요구에도 순응하는 저임금 불법고용 노동자를 투입해야 한다. 내국인은 쫓겨나고 부실·붕괴·산재·체불의 위험은 커진다. ‘돈의 삭감’을 막아야 하는데 거기엔 적정임금제가 제격이다.
◆규제 강화로 규정 준수 불가피, ‘제값 확보’ 전제돼야 = 정부는 산재 체불 불법고용 등에 대한 행정규제와 경제제재 등을 강화하고 있다. 건설사업자에 대한 등록 말소, 영업이익의 5% 이내 하한액 30억원의 과징금 부과, 공공공사 입찰참가 제한, 사업주 단위의 외국인 고용제한, 금융권 대출제한 등 전방위적이다. 이젠 인위적인 낙찰률 상향이나 적용범위 조정 등 기존의 미세조정 방식으로 약간의 공사비를 더 받아 대응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제값 받아 제값 주고 제대로 시공하기’가 그것이다.
엄격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건설업체가 생존하려면 정부가 요구하는 품질·안전·임금지급·합법고용 등의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구성원 각자의 몫과 이윤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건설현장 정상화’에 필요한 첫 단추(필요조건)는 ‘발주자가 엄격한 기준에 따라 산정한 제값인 100원 확보와 집행’이다. 공법·소재·공정관리기법 등의 객관적인 기술개발이 없는 한 근거 없는 공사비 삭감을 막아야 한다.
건설현장 정상화를 구현하려면 임금 단가를 깎아 저가로 수주하려는 ‘가격경쟁’을 막고 객관적인 기술개발로 노무량의 투입을 줄이는 ‘기술경쟁’은 장려해야 한다. 이 또한 적정임금제의 기능이다.
◆SH 현장에서 적정임금제 정착 가능성 재확인 = 한동안 미국의 공공공사에 적용되는 프리베일링 웨이지 제도(prevailing wage, 1931)의 운영 경험을 통해 적정임금제의 성과를 엿봐 왔다. 하지만 이젠 우리나라의 적용 사례인 2018년 일자리위원회 20건, 2017년 5월부터의 서울시 발주공사, 2019년부터의 경기도 발주공사, 2020년 7월부터의 SH 발주공사 등을 통해서도 ‘임금 하한선 규제’가 불법 재하도급 억제를 통해 내국인 우선 고용, 체불 및 산재 감소 등의 효과로 나타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SH 발주공사에서 재차 확인된 주요 성과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첫째, 물량단위 성과급제가 아닌 ‘8시간 일급제’로 임금을 지급한다. 이것은 하루 일당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 여부를 가릴 겨를 없이 무조건 빨리해야 하는 작업방식을 탈피하게 했다. 노동강도의 완화와 위험작업의 제거를 통해 산재가 줄었다. 작업속도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으나 ●고숙련 인력 선별 고용 ●기능수준별 작업팀 구성 ●관리·감독 강화 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둘째, 시중노임단가 이상을 지급한다. 예컨대 형틀목공의 시중노임단가는 약 28만원에 이르는데, 고임금 지급은 내국인 숙련인력에 대한 우선 고용과 외국인 합법 고용의 여건을 조성했다. 여타 공사에 비교해 내국인 고용 비율이 높아 60~80%에 달했고 외국인 불법고용은 없었다. 또한 ‘임금 단가 후려치기’(예, 28만원→10만원→4만원 등)를 전제로 하는 불법 재하도급은 적정임금제로 억제된다. 노무비 증가를 우려했으나 고숙련 인력 확보와 관리·감독 강화로 임금 이상의 생산성을 확보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었다. 숙련도별 임금 차등화를 우려했지만 기능공 이상에겐 해당 직종의 시중노임단가를 적용하되 그 이하에는 특별인부나 조력공 임금을 적용함으로써 이미 숙련수준별 임금 차등화를 구현하고 있다.
셋째, 만근 시 주휴수당을 그리고 초과근무 시 초과근로수당도 추가로 지급한다. 주말 휴식과 근로시간 단축을 통해 워라밸을 충족시켜 청년층의 진입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향후 발주자는 초과근로를 줄이기 위해 공사기간을 추가로 부여할 필요가 있다.
넷째, 낙찰률이 높아졌다. 90% 이상의 사례도 있는데 이것은 적정 공사비와 공사기간의 확보를 의미해 무리한 공기단축의 위험성을 줄이고 하자와 산재를 줄였다. 또한 적정 노무비를 확보하면서 임금지불능력이 높아져 체불도 줄었다. 예산 증가를 우려하기도 하지만 초기의 견실시공은 향후 유지보수비용을 낮춰 생애주기비용(Life Cycle Cost)을 낮추게 된다.
요컨대 현재 진행 중인 우리 건설현장에서 ‘적정임금제를 통한 건설현장 정상화’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즉시 공공공사부터 확대 시행, 건산법 개정안 통과 시급 = 국토부는 2025년에 발주한 연구제안 요청서에는 ‘공공기관 시범사업 시행방안 마련’이 언급돼 있다. 하지만 2017년부터 2025년까지 다양한 적정임금제 적용해 왔는데 굳이 시범사업을 다시 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국토부 산하기관이나 지자체 공사에 즉시 확대 시행할 때 기존 적용 사례로부터 도출된 제도개선을 위한 시사점을 반영하면 된다. 나아가 현재 적정임금제 도입을 목적으로 계류돼 있는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복기왕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을 조속히 통과시켜 공공공사로부터 시작해 민간공사로까지 확대해 나가야 한다.
불법 재하도급을 막고 제값을 확보하는 데는 적정임금제가 특효인데 이를 비껴가 ‘헛힘’을 낭비하거나 도입이 ‘지연’돼 실기해서는 안 된다.
심규범
건설고용컨설팅 대표
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