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한국 정치 후진성의 상징, 정당 현수막
동네 어귀를 지날 때마다 눈살 찌푸리게 만들던 ‘중국개입 부정선거’ 현수막이 얼마 전 사라졌다. 반가운 마음에 어찌된 일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니, 해당 현수막을 내건 정당의 대표가 수사 대상이 되어 거주지와 사무실 압수수색을 받았다는 뉴스가 보인다.이 당은 그동안 ‘중국인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중국인 무비자 입국, 관광 아닌 점령?’ 따위의 희한한 주장을 담은 현수막을 전국 각지에 내걸어 이름을 알린 당이다. 정당으로 등록은 했지만 혐오를 부추기는 허위조작정보성 현수막을 내거는 것 외에 딱히 알려진 게 없어 ‘현수막 정당’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현수막을 달기 위한 정당인 현수막 정당을 만들기도 한다더라”고 언급한 바로 그 당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의 현수막이 철거된 이유가 현수막의 내용, 즉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 표현 때문으로 여겨질 법하다. 혐오를 조장하는 현수막은 ‘금지광고물’로 간주한다는 행정안전부의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져 지난해 11월 지자체에 내려갔다는 뉴스도 전해진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은 가이드라인일 뿐이다. 법에 우선할 수 없다. 정당 현수막에 대해 지자체 허가나 신고 없이 내걸 수 있도록 허용한 옥외광고물법의 특별 우대 조항은 여전히 살아있다.
혐오 부추기는 정치현수막 폐해 극심
국회는 2022년 문제의 개정법을 통과시킨 후 정치현수막이 난립하자 설치 개수와 장소, 기간을 일부 제한하는 내용으로 2024년 다시 개정했다. 하지만 정치현수막을 사전 규제 대상에서 ‘적용 배제’한다는 핵심적 특혜 규정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이로 인해 ‘통상적 정당 활동으로 보장되는 정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표시 설치하는 현수막’은 옥외광고물 사전 규제 대상에서 애당초 제외된다. 정당이 “이건 우리 당의 정책이고,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이라고 자체 판단하면 사회 상식에 반하는 내용의 문구라도 마음대로 휘날릴 수 있는 셈이다.
이번에 ‘현수막 정당’ 대표가 압수수색 받은 것도 신고 되지 않은 계좌로 위법한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때문이다. 현수막 철거는 표현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 즉 정치 현수막에도 적용되는 최소한의 설치규정(개수와 표시기간 등)을 위반한 때문 아닐까 싶다.
쟁점은 ‘통상적 정당 활동’에 대한 해석으로 좁혀진다. 정당법 37조는 통상적 정당 활동을 “정당이 자당의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입장을 인쇄물 시설물 광고 등을 이용하여 홍보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그러니까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처럼 다른 법으로 금하는 불법 행위만 아니면, 대부분 정당 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다.
‘현수막 정당’과 궤를 같이 하는 어느 당이 ‘김현지 중국 간첩 의혹’ 현수막을 내걸었다가 강제 철거당하자 “왜 정당 활동을 탄압하느냐”며 법적 소송에 나서겠다고 반발하는 게 한 예다. 당국은 ‘정당 활동의 범위를 벗어난 개인에 대한 혐오 비방’으로 보지만, 그 정당은 ‘통상적 정당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 소송으로 갔을 때 법원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 상식선에서 예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간다는 자체가 불필요한 소모이자 사회적 낭비다. 정당 현수막도 일반 현수막과 똑같이 규제 대상에 넣어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기간에만 사전 허가를 얻어 게시하도록 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실제 이 비슷한 내용의 법 재·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기도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본회의에는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현수막은 아무리 SNS가 보편화된 디지털 세상이라 해도 사실과 정보를 알리고 소통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수단이다. 디지털 메시지는 원치 않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현수막은 눈 감고 지나지 않는 한 외면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강제 노출되는데도 댓글 하나, 반론 하나 제시할 수 없으니 불평과 원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난 주말 동네 어귀를 지나면서 보니 ‘부정선거’ 현수막이 철거된 자리에 정치인의 명절 인사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정당 현수막이 주로 국민세금(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으로 만들어지고, 용도 폐기된 뒤에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되어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또한 조금도 반갑지 않다.
현수막 제도, 이제는 개혁해야 할 때
명절 현수막에 차별과 불공정이 숨어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정당의 국회의원과 지역(당협)위원장은 정당 특권을 이용해 아무 곳에나 자유롭게 걸 수 있다. 하지만 무소속 국회의원과 정당 소속 지자체장 및 지방의회 의원은 그 같은 자유 게시가 금지된다. 간혹 우리 눈에 보이는 지자체장의 명절 현수막은 불법 아니면 개인 돈 내고 지정된 게시대에 걸은 개인 현수막이다. 한국의 정치 후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수막 제도, 이제는 개혁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