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판단 지연 속 사망근로자, 업무상 재해”
법원 “정신질환 악화에 업무 영향 인정”
기존 질환 있어도 인과관계 부정 못 해
산재 판단 지연 속에서 정신질환이 악화돼 사망한 근로자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기존 질환이 있더라도 업무 영향이 확인되면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취지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합의9부(재판장 김국현 법원장)는 이 모씨 등 유족 2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이 판결은 공단이 항소를 제기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A씨는 2020년 화장품 매장에서 근무하던 중 직장 상사로부터 개인적인 심부름 지시와 성희롱성 발언 등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회사에 신고한 뒤 퇴사했다. 회사는 조사 결과 상사의 갑질 행위를 인정해 직급 강등 등의 인사 조치를 취했다.
이후에도 A씨의 정신적·신체적 고통은 지속됐다. 직장 내 갈등과 업무 스트레스로 기존 우울증 증상이 악화됐고, 만성 통증을 동반하는 섬유근육통까지 겹치며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의료 기록과 전문의 소견에 따르면 업무 스트레스와 신체적 통증이 정신질환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A씨는 섬유근육통에 대해 산재를 신청했으나 요양급여 판단이 장기간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숨졌다. 유족들은 업무상 재해를 주장했으나 공단은 이를 불인정했다.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산재 신청 처리 지연 과정에서 A씨가 겪은 불안과 분노, 절망감이 단순한 행정적 불편을 넘어 정신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산재 신청이 장기간 처리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상실하고 무기력감이 심화됐다는 점이 의료 소견을 통해 확인됐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여러 의료 기록과 전문의 감정 결과를 종합하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직장 내 갈등이 A씨의 우울장애를 악화시켰고, 여기에 산재 처리 지연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더해지면서 정상적인 인식·판단 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어 “사망 이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왔다는 사정만으로 업무상 인과관계를 부정할 수는 없으며,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가 기존 질환을 악화시킨 경우에도 업무와 사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유족들을 대리해 소송을 제기한 김용준(법무법인 마중) 대표변호사는 “실제로 현장에서도 산재 승인 지연으로 인해 많은 근로자들이 힘들어한다”며 “공단의 결정 하나에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