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아이스크림값 인상 배경에 ‘탈세’
국세청, 오비맥주·빙그레 등 추징…대한제분·샘표 등 밀가루·생필품으로 조사 확대
술값과 아이스크림값 인상 배경을 두고 국세청이 세무조사 결과를 내놨다. 가격 인상 자체는 기업의 경영 판단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비용을 부풀리고 세금을 줄였다면 불법이라는 판단이다. 국세청은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맞춰 오비맥주와 빙그레 등 먹거리·생필품 독과점 기업을 적발해 수천억원대 세금을 추징하고 조사 범위를 밀가루와 생필품 전반으로 확대하고 있다.
국세청은 지난해 9월 먹거리와 생필품 가격 인상 과정에서 이익을 빼돌린 독과점 기업을 대상으로 1차 세무조사를 벌여 53개 업체에서 탈루소득 3898억원을 적발해 1785억원을 추징했다고 9일 밝혔다. 조사 대상 기업 상당수에서 가격 인상과 함께 특수관계법인을 통한 이익 이전, 비용 부풀리기, 탈세가 동시에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 맥주 제조업체 오비맥주는 판매점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약 1100억원 규모의 리베이트를 지급하고 이를 광고비로 처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 광고 효과와 무관한 비용을 영업비로 신고해 세금을 줄였다는 게 국세청 판단이다. 원재료 구매대행을 맡은 특수관계법인에 수수료 약 450억원을 과다 지급해 이익을 나눈 정황도 드러났다. 국세청은 이런 비용 구조가 제품 가격에 반영돼 맥주 가격을 22.7% 인상하는 요인이 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른 추징액은 약 1000억원이다.
아이스크림 제조업체 빙그레도 특수관계법인을 활용한 이익 이전 사례로 지목됐다. 국세청은 빙그레가 계열 물류회사에 물류비 약 250억원을 과다 지급한 후 정상 비용으로 가장해 과세를 회피했다고 설명했다. 물류비 증가를 이유로 주요 제품 가격이 25% 인상되면서 소비자 부담이 커졌다는 판단이다. 빙그레에 대한 추징액은 200억원대다.
국세청은 이번 조사에서 가격 인상은 기업의 경영 판단일 수 있지만 비용을 인위적으로 부풀리거나 특수관계법인을 통해 이익을 이전해 세금을 줄였다면 명백한 불법 탈세에 해당한다고 선을 그었다. 독과점 구조에서 가격 인상과 탈세가 함께 작동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확인됐다는 설명이다.
국세청은 독과점 지위를 이용한 가격 인상과 탈세가 구조적으로 결합돼 있다고 보고 조사 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 왔다. 지난해 12월에는 가구·비닐하우스 필름 업계(2차 조사), 지난달에는 설탕·가구 담합 업체(3차 조사)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진행했다.
최근에는 4차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대상은 밀가루 등 가공식품 제조업체, 청과물 등 농축산물 유통업체, 프랜차이즈 가맹본부 등 14곳이다. 이들의 탈루 혐의 금액은 5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검찰이 최근 담합 혐의로 기소한 대한제분도 조사 대상에 포함됐다. 국세청은 대한제분이 다른 밀가루 업체들과 가격 인상 순서를 정하는 방식으로 담합해 수년간 제품 가격을 44.5% 인상했다고 밝혔다. 이후 거짓 계산서를 주고받아 원재료 매입 단가를 부풀리고 담합으로 얻은 이익을 축소 신고한 정황도 확인됐다. 사주 일가의 장례비와 고급 차량 수리·유지 비용을 회사가 대신 부담한 사례도 포착됐다. 국세청은 대한제분의 탈루 혐의액을 1200억원 규모로 보고 있다.
샘표식품 역시 과점 지위를 이용한 가격 인상과 이익 이전 사례로 조사 대상에 올랐다. 국세청은 주요 원재료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간장·고추장 등 주요 제품 가격을 10.8% 인상해 영업이익이 300% 이상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익 일부는 창업주 자녀가 소유한 법인으로 이전돼 포장용기를 시세보다 비싸게 매입하고 고액의 임차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소득을 축소 신고한 것으로 판단했다.
유통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됐다. 할당관세 혜택을 받아 과일을 싸게 들여온 청과물 유통업체는 유통비 증가를 이유로 판매가격을 오히려 인상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세청은 이 업체가 특수관계법인에 유통비를 과다 지급해 비용을 부풀린 후 이를 가격 인상의 근거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물티슈 제조업체는 실체가 없는 특수관계업체를 유통 단계에 끼워 넣어 비용을 부풀린 사례로 적발됐다. 상표권을 사주 명의로 등록한 뒤 법인이 사용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회사 자금이 사주 개인에게 흘러간 정황도 확인됐다.
프랜차이즈 가맹본부 조사도 이어지고 있다. 국세청은 전국 1000개 이상 가맹점을 둔 외식 프랜차이즈 가맹본부가 가맹지역본부에서 받은 로열티와 광고분담금을 신고하지 않았고, 실제 근무하지 않는 사주 배우자와 자녀에게 수십억원의 급여를 지급한 사례를 확인했다. 또 다른 분식 프랜차이즈는 가격을 올리는 동시에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을 적용하면서 신규 가맹비 수입을 누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세청은 공정거래위원회나 검찰·경찰 수사로 담합 행위가 확인된 업체에 대해서는 조세 탈루 여부를 즉시 분석해 세무조사에 착수하겠다는 방침이다.
안덕수 국세청 조사국장은 “가격은 시장의 문제지만, 세금은 법의 문제”라며 “국민 부담으로 이어지는 독과점 탈세 행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해 엄정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관련 기업들은 “세무조사 결과에 대해 소명 절차를 진행 중”이라며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