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떠올린 ‘애플 인 차이나’

2026-02-11 13:00:01 게재

애플, 중국 등에 업고 질주하다 덫에 걸린 형국…미·중 사이에 낀 한국에도 시사점

지난 추석 연휴 내내 몰두해서 읽은 책은 패트릭 맥기(Patrick McGee)의 ‘애플 인 차이나’였다. 3개월 후, 필자는 김포발 베이징행 항공기에 탑승해 있다. 비행기는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 착륙을 앞두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공장과 공장 사이로 인상 깊은 구절이 떠오른다. “애플이 오늘날 애플이 되는 데는 중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며, 오늘날 중국 또한 애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맥기의 문장 말이다. 출장지 숙소였던 베이징 파이낸셜 스트리트에서 붙들었던 화두는 스마트폰 제조사와 거대시장의 공생 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 정교하게 진행된 지정학적 의존과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균열의 징후였다.

베이징 대표 쇼핑몰 ‘시단(西單) 조이시티’의 애플스토어는 여전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을 때다. 당시 중국에서 애플스토어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매장은 아메리칸 드림을 동경하던 중국 신세대의 성지가 되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독일 카메라 브랜드 라이카(Leica)를 탑재한 중국의 최신 스마트폰 ‘샤오미 15 울트라’를 들고 젊은이들이 애플 매장 앞을 지나가는 광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2026년 1월, 베이징 대표 쇼핑몰 ‘시단(西單) 조이시티’의 애플스토어는 여전히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유리창에 부착된 선물 테마의 리본 장식 애플 로고가 특히 ‘중국적’이다. 이 로고는 지난해 말부터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사진 김욱진

구미 공장의 붉은 현수막

우리는 흔히 애플의 제조 신화가 폭스콘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맥기의 책은 초반부 서술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 1990년대 후반 애플의 부활을 알린 상징적 제품은 투명하고 영롱한 일체형 컴퓨터 ‘아이맥 G3’였다. 이를 생산한 곳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IMF 외환위기를 겪던 시절, 경북 구미의 LG전자 공장에는 ‘생존(生存)’이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당시 아이맥 G3를 디자인한 ‘조니 아이브’는 여러 차례 직접 구미를 찾아 한국의 엔지니어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세차게 몰아붙였다.

당시 LG전자는 애플의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니었다. 조니 아이브와 스티브 잡스가 구상한 반투명 일체형 컴퓨터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사출성형 공정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야만 했다. 맥기는 책에서 애플이 초기 공급망 기틀을 닦는 과정에서 한국의 제조 역량을 어떻게 극대화했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LG전자는 웨일스와 멕시코, 대한민국 구미에서 아이맥을 조립하며 파산 직전의 애플을 구해낸 은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애플의 선택은 냉혹했다. 이때 애플의 운영 전반을 재정비하기 위해 영입된 인물이 팀 쿡이다. 팀 쿡은 낮은 단가와 규모의 경제를 찾아 새로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2000년대 초, 폭스콘이 등장하자 애플은 주저 없이 LG전자와 조립 협력을 줄이기 시작한다. 한국 기업이 애플에 기술 토대와 제조 시스템 표준을 제공했지만 자본 논리 앞에서 파트너십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이었다.

베이징 스타벅스(星巴克) 진스팡지에(錦什坊街) 지점에서 책을 다시 펼쳤다. 이 거리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신혼생활을 한 곳이다. 역사적 장소에서 중국과 애플에 관한 사례 연구를 다시 읽고 싶었다. 부족한 시간 탓에 바로 중심부로 넘어갔다. 31장이 책의 핵심이다. 맥기가 명명한 애플의 ‘마셜 플랜'은 이 책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2016년 1분기, 애플의 중국 매출 실적이 전년 대비 26% 급감한다. 중국이 아이북스 스토어와 아이튠즈 무비를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자 팀 쿡은 직접 베이징으로 날아간다. 여기서 그는 5년 간 중국에 275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양해각서에 서명한다.

이 숫자가 뭘 의미할까. 1948년 미국의 마셜 플랜을 떠올려보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년 동안 16개 유럽 국가의 재건을 돕기 위해 133억달러를 지원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2016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310억달러에 달한다. 애플이 중국에 쏟아부은 금액이 이 숫자의 2배를 넘는다. 애플은 단순히 중국에 공장을 지은 게 아니다. 애플은 중국의 생산 시스템을 개편해 수백만 명 노동자를 훈련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자동화 설비와 부품 최적화 노하우가 중국에 이식됐다.

애플의 마셜 플랜은 자발적 기술 이양의 과정이다. 애플은 자신의 설계 도면을 현실로 구현해줄 ‘붉은 공급망(Red Supply Chain)’을 육성하기 위해 모든 노하우를 쏟아부었다. 맥기는 “애플이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하며 중국에 불을 선물하듯 기술과 지식을 건넸다”고 표현한다. 그 불이 이제 애플의 안마당을 위협하고 있다. 애플이 키운 럭스셰어, 비와이디, 고어텍 같은 기업들은 한국과 대만을 제치고 아이폰 공급망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애플이 쏟아부은 2750억달러가 중국이 ‘기술 주권’을 완성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 셈이다.

포획된 거인과 3000만명의 노동자

애플이 중국에 미친 영향은 수치로 증명된다. 애플은 2008년 이후 최소 3000만명의 중국 노동자를 훈련했다. 이는 캘리포니아 전체 노동 인구보다 많은 숫자다. 애플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영세 부품사를 규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시스템을 구축했다. 2015년 애플의 대중국 투자는 연간 550억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살리기 위해 내놓은 ‘CHIPS’ 법안의 총예산 520억달러를 매년 중국에 쏟아부은 것과 같다.

맥기는 더이상 애플을 ‘혁신의 아이콘’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에게 애플은 중국 시스템에 의해 포획된(Captured) 거인에 가깝다. 중국이 아이폰 생산 라인의 전원을 내리는 순간 세계 시가총액 1, 2위를 다투는 기업의 심장도 멈춘다는 게 맥기의 분석이다. 물론 팀 쿡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베이징에서 책을 읽으며 가장 서늘했던 점은 애플이 중국에 전수한 노하우가 부메랑이 되어 이제 애플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9년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자국 브랜드의 점유율은 10% 미만이었다. 애플이 중국 공급망을 완성하고 중국에 기술을 전수한 지 불과 10년 만에 중국 브랜드는 자국 시장의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샤오미와 화웨이가 내놓는 최신 폴더블폰과 인공지능 기능은 이제 애플을 앞서는 수준이다.

맥기가 인터뷰한 한 전직 애플 부사장의 고백은 뼈아프다. “우리가 중국에 생산 라인을 조성할 때 지정학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회고 말이다. 효율성과 마진을 극대화해 혁신의 정점에 선 기업이 자신을 위협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키운 셈이다. 이제 애플 스스로가 중국이라는 국가 시스템 안에서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베이징에서 떠올린 ‘반례(反例)’

베이징 출장을 마무리할 시점이다. 다시 김포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많은 중국인 승객의 손에 여전히 아이폰이 들려있었다. 이제 이 스마트폰은 단순한 통신 도구가 아니라 미중 경쟁의 최전선으로 읽힌다. 어쩌면 애플에게 중국은 탈출구가 사라진 거대한 공급망의 사슬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마무리하며 맥기가 묻는다. 잡스에게 애플을 이어받아 회사를 키운 팀 쿡은 ‘최고의 실용주의자’로 평가받을 것인가, 아니면 ‘미국을 탈산업화시키고 라이벌을 키운 주인공’으로 해석될 것인가.

중국은 어떻게 첨단 전자제품 같은 복잡한 분야에서 이토록 빨리 발전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사실은 애플이 중국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매년 애플은 자사의 기기를 단순화하기 위해 난해한 공정과 기술 지식을 중국으로 가져와 회사 규모를 키웠다. 이는 오랜 시간 중국이 차곡차곡 흡수한 암묵지(tacit knowledge)가 되었다.

베이징 금융가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미국을 상징하는 혁신기업이 마주한 장벽이었다. 극단적 완벽함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 애플은 중국을 등에 업고 질주하다가 중국에서 덫에 걸린 형국이다. '애플 인 차이나' 한국어판 서문에서 맥기는 세계 각지에 공급망을 구축한 우리 전자 기업을 한껏 치켜세운다. 주례사를 벗어날 수 없는 번역판 서문임을 감안하더라도 맥기가 책에서 비판한 지나친 중국 의존도의 반증 사례가 한국의 전자 회사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기술굴기를 꿈꾸는 중국과 끊임없는 혁신 생태계를 보유한 미국 사이에서 경쟁해야 하는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