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스타인 파일 권력층 전반을 뒤흔들다
미국 각료·유럽 왕실 이어
영국 총리까지 의혹 확산
미국에서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직접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그는 10일(현지시간) 상원 세출위원회 상무·법사·과학 소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엡스타인과 세 차례 만난 사실을 인정했다고 AP통신 등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다만 “어떤 개인적 관계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2012년 엡스타인 소유 섬 방문 의혹과 관련해서는 가족 휴가 중 점심을 함께한 것이 전부였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러트닉 장관이 지난해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2005년 이후 엡스타인을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한 점이다. 이번 청문회 증언과 배치되면서 신뢰성 논란이 커졌다. 그는 공개된 문건 가운데 자신과 엡스타인을 직접 연결하는 이메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야권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사임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백악관은 방어에 나섰다.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러트닉 장관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밝혔다. 러트닉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과 주요 교역국과의 협상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다만 백악관은 엡스타인의 공범이자 옛 연인인 길레인 맥스웰이 제기한 사면 또는 감형 요청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우선순위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유럽 왕실도 문건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스웨덴의 소피아 왕자비는 결혼 전 20대 시절 엡스타인을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한 번은 식당에서 열린 사교 모임, 다른 한 번은 여러 명이 참석한 시사회였다. dpa통신과 스웨덴 현지 언론, EFE통신 등에 따르면 그는 엡스타인의 범죄 보도를 접한 뒤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뜻을 전하며 정의가 실현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스웨덴 왕실은 지난 20년 동안 어떤 접촉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영국 왕실은 이미 큰 상처를 입은 상태다. 엡스타인과의 연루 의혹으로 앤드루 왕자는 왕실 공식 직무와 군 명예 직위를 박탈당했다. 노르웨이와 벨기에 왕실 인사들 역시 엡스타인과의 부적절한 접촉 정황이 드러나며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유럽 언론은 이번 사태가 왕실의 도덕성과 투명성 기준을 다시 묻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치적 부담은 영국 정부에도 번졌다. BBC 방송에 따르면 키어 스타머 총리는 엡스타인과 친분을 유지했던 인사를 주미 대사로 임명한 판단이 문제로 지적되며 당내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사퇴 의사가 없다고 밝혔고, 내각 핵심 각료들은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둔화와 정책 혼선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거세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