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공시 로드맵, 국제 기준·속도 크게 미달”
자산 30조원 기준, 25년 2조원서 크게 후퇴
'공시 3년 유예'로 알맹이 빠진 배출량 공시
법정공시 아닌 거래소 공시도 너무 보수적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국내 ESG(지속가능성) 공시 로드맵 초안’이 국제 기준과 속도에 크게 미달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과거 로드맵 ‘2025년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 적용’ 계획에서 크게 후퇴한 ‘자산 30조원’ 기준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공시 3년 유예와 중소 협력사 대거 면제 등의 스코프 3(Scope3, 공급망 내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는 넷제로(Net-Zero) 전환이라는 공시제도의 실효성을 훼손할 우려가 크다는 평가다.
◆30조원 이상 기업 58곳에 불과 = 26일 회계기준원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전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ESG 공시제도 로드맵 초안을 의결한다. 금융위는 3월 31일까지 의견 수렴을 거쳐 4월 중 로드맵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후 한국거래소 공시 규정 개정과 함께 관계부처·유관기관 합동 워킹그룹을 구성해 세부 가이드라인 마련, 파일럿 테스트, 스코프3 배출량 산정·추정 인프라 구축 등 이행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초안이 발표되자 즉각적으로 시민사회단체와 ESG 싱크탱크들은 국제 기준과 속도에 크게 못 미치는 실망스러운 안이라며 거센 비판을 쏟아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공시 대상기업의 규모다.
과거 문재인 정부 시절의 ‘2025년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 적용’ 계획에서 크게 후퇴한 ‘자산 30조원’ 기준은 관례적인 대기업 기준 2조원에 비추어 봐도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융위 자료에 따르면, 현재 자산규모별 공시기업 비중을 보면 30조원 이상 기업 58곳 중에서 48곳(83%), 10조~30조원 기업 48곳 중에서 36곳(75%)이 공시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위는 또 일본과 유럽연합(EU)의 공시 완화 흐름에 맞췄다고 강조했지만 국제 흐름은 더 빠른 상황이다.
24일(현지시간) EU 이사회가 최종 승인한 CSDDD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와 CSRD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에 따르면 공시 적용 대상 기업은 △직원 5000명 초과이면서 연매출 15억유로(약 2조5000억원) 이상을 동시에 충족하는 EU 기업과 △EU 내 매출이 15억유로를 넘는 역외(비EU) 기업으로 조정됐다. 이행 시점도 2027년 중반에서 2029년 중반으로 2년 늦춰졌다.
일본의 경우 2027년엔 매출 3조엔(27조4000억원), 2028년부터는 1조엔(9조1000억원) 이상으로 대상 기업이 확대된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은 “국내 주요 상장사들은 이미 2008년부터 현재까지 CDP를 통해 기후 공시 역량을 축적해 온 상황”이라며 “글로벌 공급망 경쟁국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2028년 도입 시 최소한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부터는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 정합성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정” = 가장 뜨거운 쟁점인 스코프3 공시는 원칙적으로 2031년부터 적용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ESG 공시 의무화 시점보다 3년 뒤로 유예한 것이다. 각 공시 대상군에 대해 3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구조로, 2028년부터 공시 의무가 시작되는 대기업은 2031년부터 스코프3를 공시하게 된다.
스코프3는 기업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평균 70~90%를 차지하는 핵심 영역으로, 이를 제외하면 기후 영향을 온전히 평가하기 어렵다. 400여 곳의 글로벌 기관투자자 그룹(IIGCC)도 스코프3 데이터 없이는 투자의 기후리스크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1년 유예를 제시했고, EU는 유예기간을 주지 않았다. 일본과 호주는 1년 유예 기간을 부여했다.
한국책임투자포럼은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에 비추어 3년 유예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며 “이미 우리나라 기업은 2023년 127개, 2024년 158개, 2025년에는 222개사로 상당수가 스코프3를 보고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3년의 유예 기간은 너무 길다”고 지적했다.
이어 포럼은 “우리나라의 ESG 공시 최초 시기가 EU, 일본 등 선진국과 비교해 지체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코프3 유예는 1년 정도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윤원섭 녹색전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국내외 고객사는 이미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의 중소·중견 협력업체에까지 지속가능성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며 “공시 대상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중소·중견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후공시 역량 강화를 막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뒤처지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총장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동향이나 EU의 속도 조절 등 단기적 흐름을 핑계로 지속가능성 공시 대상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기준을 완화한다는 것은 탄소중립 경제로의 전환기임을 고려할 때 근시안적인 접근”이라며 “정부가 오는 4월 최종안을 확정하기 전까지 국내외 투자자와 전문가, 시민사회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로드맵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