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러시아 신기루에서 벗어나기

2026-02-27 13:00:02 게재

러시아의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벌써 4주년을 맞았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하루 만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소리치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1년이 넘었으나 종전은커녕 휴전마저 불투명한 상태다. 2022년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를 며칠 사이에 무너뜨리겠다던 블라디미르 푸틴의 ‘특수작전’은 이제 지난 세기 소련이 나치독일을 상대로 치렀던 ‘세계대전’(1941~1945년)보다 길어졌다.

아무도 전쟁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 모두 엄청난 규모의 사상자를 낸 데다 경제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상식적으로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던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의 종결을 압박하는 정책은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든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이라는 러시아의 노골적 국제질서 파괴 행위를 인정할 수는 없다는 원칙과 현실도 만만치 않다. 침략을 당해 영토를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무력을 통한 영토 확장을 한번 인정하면 미래에도 똑같은 전쟁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4년 크림반도의 점령이 2022년 전면적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패턴으로 연결되었듯이 말이다.

한국의 여론과 외교 러시아 신기루에 빠져

한국은 지난 4년 동안 국제질서의 수호를 위해 원칙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서 침략 세력인 러시아의 제재에 동참해 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대국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미온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북한이 파병을 통해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군사적으로 직접 돕는 와중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주저했다. 한국의 여론과 외교가 러시아 신기루에 빠져 있는 탓이다.

첫째는 강대국 러시아라는 신기루다. 20세기 미국과 어깨를 겨누던 초강대국 소련의 연장선에서 지금도 러시아를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는 염려와 우려다. 하지만 러시아의 인구 규모는 프랑스와 독일을 합한 것보다 작고, 경제 규모는 겨우 이탈리아 수준일 뿐이다. 러시아는 여전히 엄청난 핵 강대국이지만 시리아 베네수엘라 이란 등 동맹국의 붕괴나 위기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다.

둘째는 자원의 엘도라도로서의 러시아다. 시베리아에 엄청난 규모의 석유와 가스는 기본이고 대량의 희토류를 보유하고 있다는 설명은 러시아가 트럼프를 유혹하는 중요한 논리이자 한국의 논자들이 자주 동원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얼어붙은 땅속에 있는 자원은 고도의 기술과 대규모 투자를 통해 개발해야 한다. 개발해서 수지가 맞는다면 러시아의 큰 형을 넘어 아버지뻘이 되어버린 중국이나 ‘딜의 화신’을 자처하는 트럼프의 미국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셋째는 지구온난화 시대에 북극항로를 통제하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신기루다. 누구라도 지도를 보면 러시아가 북극항로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온난화로 얼음이 녹아 운항이 수월해지면 러시아와 친해야 북극항로를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논리의 배경이다. 하지만 북극은 길이다. 그것도 이번 전쟁으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유럽으로 가는 길이다. 러시아와 아무리 친하더라도 유럽과 소원해지면 길은 있되 목적은 사라지는 형국이다.

신경써야 할 외교 상대는 유럽과 우크라이나

이제 러시아의 신기루에서 벗어날 때다. 러시아는 지구를 몇번이라도 파괴할 수 있을 만큼의 핵무기를 지니고 있으나 예전의 초강대국은 아니다. 러시아의 자원은 풍부하나 개발의 실질적 선택권은 중국과 미국이 우선이다. 북극항로도 유용할 수 있으나 유럽과의 무역이 핵심 목표라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

한국이 진정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는 외교 상대는 우크라이나와 유럽이다. 국제법에 기초한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챙기는 것은 물론 외교적으로 소외된 우크라이나와 장기적이고 탄탄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과 유럽은 러시아와 중국의 지정학적 위협에 직면하면서도 전통적 동맹인 미국을 더는 믿을 수 없는 동병상련의 상황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