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대신 금…전쟁 공포에 안전자산 지형 변화
이란 확전 우려에 금·달러 급등
미·유럽 단기 국채금리 일제히 상승
파이낸셜타임스(FT)는 2일(현지시간) 이란 전쟁이 인플레이션 충격을 유발할 수 있다는 불안이 커지면서 대형 투자자들이 국채 대신 금과 달러를 선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금 가격은 이날 장중 2.6% 급등해 트로이온스당 5400달러를 넘어섰다. 카타르 천연가스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 이후 새로운 에너지 위기 가능성이 제기되면서다. 이후 상승폭을 일부 반납했지만 여전히 0.7% 오른 수준을 유지했다. 금은 1월 조정 국면에서 기록한 낙폭도 대부분 만회했다.
반면 통상 위기 국면에서 매수세가 몰리던 국채는 약세를 보였다. 물가 상승 압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단기물 중심으로 금리가 뛰었다. 독일 2년물 국채 금리는 0.08%p 오른 2.09%를 기록했다. 영국 2년물 금리도 0.11%p 상승해 3.64%로 올랐다. 미국 2년물 국채 금리 역시 상승 흐름을 보이며 안전자산으로서의 역할에 의문이 제기됐다.
헤지펀드 마셜웨이스의 최고시장전략가 세브 바커는 “우리는 채권이 위험회피 국면에서 보호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있다. 반면 금은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걸프 지역 사태가 “채권이 아닌 안전자산에 대한 비중 확대 논리를 강화한다”고 덧붙였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산하 블랙록인스티튜트도 장기 국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내놨다. 이들은 “이번 중동 분쟁이 확대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을 고려하면 장기 국채는 신뢰할 만한 포트폴리오 완충재가 아니다”고 평가했다. 경기 둔화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채권 가격이 오히려 압박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달러 역시 강세를 보였다.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0.9% 상승했다. 월가의 한 대형 투자은행 선임 트레이더는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오래 지속된다”며 달러와 금을 주요 피난처로 지목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은 금리 전망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유럽 가스 가격은 30% 이상 뛰었고 이에 따라 유럽중앙은행(ECB)의 금리 인하 기대가 후퇴했다. 유로존에서도 추가 0.25%p 인하 가능성은 약 15%로 떨어졌다. 에너지 가격이 장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통화당국이 물가 압력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프랑스 자산운용사 카르미냑의 투자위원 케빈 토제는 “우리는 일부 위험을 줄이고 있다. 가능한 시나리오의 분포가 상당히 넓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식 비중을 줄이고 일부 자금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유가 급등에 민감한 종목에 대해서도 조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씨티의 글로벌 주식전략 책임자 베아타 만테이는 일본 주식에 대한 투자 의견을 비중확대에서 비중축소로 낮췄다고 밝혔다. 일본 시장이 높은 유가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방위·에너지 비중이 높은 영국 주식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상황이 악화되면 투자자들은 가능한 곳에서 위험을 줄이려 할 것”이라며 “지금은 아직 선택적인 매도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BNP파리바자산운용의 선임 포트폴리오매니저 니콜라스 트리니데는 “분쟁이 길어질수록 중앙은행은 이러한 인플레이션 압력을 전망에 반영해야 하고, 이는 금리에 상방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 참가자들의 가장 큰 우려는 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그리고 원유와 가스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 어느 정도 차질이 발생할지다.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물가와 금리, 성장 전망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전자산의 기준 자체가 재정의되는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