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육·자격·고용 연결해 직업 설계
지난 10여년 동안 독일의 직업세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어왔다. 변화의 배경에는 디지털화와 인공지능(AI)의 확산,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전환, 그리고 급속한 고령화라는 세가지 흐름이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존 직업을 사라지게 하거나 새 직업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산업과 기술 변화에 맞춰 직무를 업데이트하거나 필요한 경우 새로운 직업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낸다.
10년간 신규 국가 공인 직업은 5개뿐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독일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국가 공인 직업은 전자상거래 판매원(2018년), 건물 시스템 통합 전자기술자(2021년), 내륙수로선장(2022년), 요리실무전문가(2022년), 몰입형 미디어 디자이너(2023년) 등 다섯개에 불과하다. 독일의 직업세계가 급격하게 요동치기보다는 산업 변화에 맞춰 점진적으로 변화함을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새로운 직업이 바로 ‘몰입형 미디어 디자이너’다. 이 직업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확장현실(XR) 기술을 활용해 사용자가 실제 세계처럼 경험할 수 있는 가상환경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전문가이다. 기존 미디어 디자이너가 영상·이미지·오디오를 활용해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설계했다면, 몰입형 미디어 디자이너는 사용자가 디지털 환경 속에 직접 들어가 경험하도록 만드는 가상세계를 설계한다.
이 직업이 새롭게 만들어진 이유는 기술 변화 때문이다. 그동안 VR·AR 콘텐츠 제작은 미디어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게임 개발자 등 다른 직종의 인력이 직무를 확장해 수행해왔다. 그러나 가상현실 기술이 게임 교육 마케팅 영화 산업훈련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전문인력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본래 다른 직업의 일부 업무였던 것이 기술과 범위의 확장으로 독립된 직무로 발전됐다.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2023년 ‘몰입형 미디어 디자이너’를 국가 공인 직업으로 신설했다 이 직업의 교육과정은 3년이며 직업학교 교육과 기업 현장훈련을 병행하는 이원화 직업훈련 방식으로 진행된다. 교육생은 훈련기간 동안 약 775~1200유로(약 113만~175만원)의 월급을 받고 훈련을 마치면 국가직업자격을 취득한다. 이후 취업하면 초임은 세전 월 약 2471유로(약 420만원), 평균 임금은 약 3050유로(약 526만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유망 직업’이 아닌 직업을 제도로 만든다
독일에서 이러한 직업이 신설되는 과정은 먼저 기업에서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인력 수요가 발생하면 사용자단체와 노동조합이 기존 직업의 직무를 개편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직업이 필요한지를 검토한다. 새로운 직업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노사와 전문가가 직업훈련 내용과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관련 법안을 만든다.
이후 노·사·정 협의와 연방정부 승인 절차를 거쳐 공식 직업이 법령으로 공포된다. 직업의 이름, 교육과 훈련의 커리큘럼, 자격시험방식까지 법으로 규정되고 직업의 내용과 미래 비전이 제시된다.
한국에서는 기술이 변화할 때마다 ‘유망 직업’ 목록이 빠르게 만들어지지만 실제 산업현장에서 안정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 독일은 직업을 단순한 직무나 직종이 아니라 교육 자격 고용이 연결된 하나의 틀로 다룬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더라도 기존 직업을 먼저 업데이트하고 충분한 수요와 독자적 직무가 형성될 때에만 새로운 직업을 도입한다. 그 결과 공인된 직업교육은 안정적인 일자리로 연결된다.
디지털 전환과 AI 확산이 가속화되는 시대, 산업의 수요와 직업교육과 훈련, 고용을 연결하는 제도가 중요하다. 독일의 몰입형 미디어 디자이너 사례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직업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탄생하고 노동시장에 정착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노동시장 역시 직업 형성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정미경 독일정치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