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드러낸 그늘, 아세안의 이주노동 의존 경제
일자리 찾아 해외로 나간 자국 노동자 송금에 기대는 성장 구조 … 저임금 고착·기술정체 부작용 확산
특히 중동에 대규모의 인력을 보내고 있는 필리핀은 매우 난감한 처지에 있다. 전쟁 초기 32세의 필리핀 여성 간병인이 이스라엘에서 이란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던 노인을 방공호로 대피시키던 중이었다. 필리핀 정부는 4월 5일까지 4231명의 노동자를 귀국시켰으며 전황 진전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을 송환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일자리가 부족한 대부분 아세안 국가들은 해외로 인력을 내 보낸다. UN은 2024년 현재 2400만명 이상의 아세안인이 해외에 거주한다고 추산한다. 필리핀의 이주자가 698만명으로 가장 많으며, 이어 미얀마 432만명, 인도네시아인 375만명, 베트남인 369만명, 그리고 말레이시아인들 243만명이 국제 이주민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제이주자는 일반적으로 12개월 이상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국적을 바꾸지 않은 해외 교포, 유학생, 이주노동자가 포함된다. 이 중의 상당수가 이주노동자로 생각되고 오히려 단기 이주 노동자는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이주 노동은 외환이 부족한 동남아 국가에게 주요한 외화가득원이다. 필리핀의 송금 수취액은 2024년 403억달러로 GDP의 8.7%인데, 상품무역수지 적자 687억달러의 상당부분을 메꿔주고 있다. 그래서 필리핀에서는 이주노동부라는 정부부처가 노동력 송출, 안전 및 권리보호에 신경쓰고 있다. 비록 송금액은 많지 않지만 캄보디아의 수취액도 GDP의 6.1%에 이른다. 군부 쿠데타로 다양한 경제 제재의 대상이 된 미얀마의 경우 통계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노동자들이 국내로 보내는 외화는 외화유동성의 생명줄 같은 역할을 한다.
지난 3월 25일 파리에서 개최된 EU 국방전략포럼(2026)에 동남아에서 유일하게 참석한 필리핀의 기보 테오도로 국방장관은 “필리핀 노동자들은 유럽과 미국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인력이다. 병원, 선박, 노인 복지 시설 등에서 필리핀 노동자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필리핀인이나 베트남전을 계기로 해외에 연고를 만든 베트남인들이 세계 각지로 진출한다면 다른 아세안 국가의 이주 노동자들은 주로 아세안 역내로 이동한다. 이주 노동자의 수입국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이다. 송출국가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이다. 싱가포르에는 외국인 이주자가 284만 명이 있으며 이는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48.7%이다.
싱가포르는 가사 노동, 조선 및 해운, 반도체 등 전자업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고급인력도 고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이나 싱가포르 국영 기관들도 고급인재 유치를 위해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가장 많은 외국인 이주자를 송출한 국가는 말레이시아로 115만명 이상이다. 말레이시아의 숙련인력은 국내 저임금 대신 고임금을 찾아 싱가포르로 오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주요 송출국이지만 동시에 저임 노동력의 수입국이다. 176만명의 인도네시아인을 비롯해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가사도우미나 고무 및 팜 농장의 노동자로, 저숙련 노동력이 필요한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같은 종교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 다른 나라는 같은 이슬람 국가라는 점에서 노동자들이 말레이시아로 이동한다. 말레이시아에는 공식적 외국인 노동력 보다도 적게는 100만명에서 많게는 300만명 정도의 비합법적 노동자가 정부의 눈을 피해 일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정부는 주기적으로 이들을 단속하고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
태국은 저임 단순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수입국이다. 소득수준이 낮은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많은 노동력이 오래 전부터 태국으로 유입되었다. UN은 2024년 171만명의 미얀마인, 29만명의 라오스인, 그리고 38만명의 캄보디아인이 태국에 있는 것으로 집계한다. 그러나 단기노동자나 비합법 체류자를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실제로 2025년에도 공식 고용허가자 외에 거의 200만명에 가까운 미얀마인들이 비합법적으로 각종 서비스, 어업, 건축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캄보디아 당국은 2025년 6월 양국이 국경분쟁을 시작하기 이전에 120만명이 태국에서 일을 한다고 밝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자리를 포기하고 캄보디아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UN의 통계에 비해서는 더 많은 캄보디아 노동력이 태국에 있다.
이주 노동의 정치 사회적 파급효과
노동력 송출 국가는 국내 실업문제 경감, 송금액 수취로 부족한 외환문제 경감 등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수입국은 저임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효과만 인 것은 아니다. 노동력 수입국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에서 다국적기업은 그 동안 경제성장의 주역이었고, 이들은 인건비의 안정을 원한다. 이런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력은 전반적으로 인건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2024년 1인당 소득이 9만달러 이상인 싱가포르의 평균임금 수준이 한국과 비슷한 이유이다.
말레이시아와 태국도 1인당 소득에 비해 임금이 매우 낮은 국가이다. 2015년부터 2024년 기간에 태국의 1인당 소득은 33.1% 증가했으나 최저임금은 21% 증가에 그쳤다. 말레이시아의 경우도 오랫동안 저임금을 유지했으나 이 때문에 고급인력이 해외로 유츌되고, 다국적기업들이 기술개발에 소극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최근 수년간 최저임금을 빠르게 올렸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의 임금 수준은 유사한 소득 수준의 국가에 비해 낮다. 인건비 안정은 다국적기업들의 기술개발이나 첨단장비 도입 유인을 저하시키고, 노동자들의 소득증가를 더디게 한다. 당연히 소득과 부의 불균현상을 악화시키면서 사회적 역동성을 저하시킨다.
국민의 해외 취업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다. 특히 선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한 이주 노동자들이 귀국하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해외에 진출한 노동력이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필리핀 이주노동부에 의하면 2024년 신규 해외취업자로 나간 사람들의 직종은 청소부, 가정부 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말레이시아나 태국에 진출한 인근 국가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저기술 제조업, 영세 서비스, 어업, 팜오일 및 고무농장, 건축현장에 종사한다. 이들이 후일에 귀국하여 자국의 기술을 발전시키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베트남의 이주자들은 상당수가 미국, 유럽, 호주, 한국, 일본 등 선진국으로 나갔으며, 이들 중에서는 유학생도 많아 시간이 지나면 경제성장에 더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인권 사각지대 놓인 이주노동, 갈등의 뇌관
한편 외국인 노동력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 송출국의 이주 노동자나 남은 가족의 생활은 불안정하다. 현지에서도 노동자들은 언제나 안전문제를 안고 있다. 수입국에서는 이주 노동자의 동화 문제, 비합법적 체류자로 인한 사회질서 안정 문제에 직면한다.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말레이시아나 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노동자의 대우에 주목한다. 국력이 약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노동자들은 말레이시아나 태국에서 합법적으로 취업한다고 해도 약자의 입장에 있다. 고용허가 기간이 끝나고 지하로 스며드는 노동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특히 감시망이 약한 어업, 건축, 영세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강제 노역 등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기 어렵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올해 중반 타결을 목표로 현재 진행중인 EU-태국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EU가 태국의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인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아세안에서 온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소위 3D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활용은 피할 수 없는 일이므로 송출국과 우리가 상호 호혜적인 경제적 결과를 낳아야 될 것이다. 또한 이주 노동자들이 귀국후 각자의 나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 있도록 기술습득이나 훈련 등에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