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이 ‘배터리 혁명’ 앞당긴다
블룸버그 “올해 배터리 설치 30% 증가” … 화석연료 공급불안에 ‘대체 인프라’ 부상
중동전쟁이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구조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화석연료 공급 불안과 가격 급등 속에서 배터리 기반 전력저장시스템이 ‘대체 인프라’로 급부상하며 전 세계 전력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배터리 비용 7년새 75% 하락 = 블룸버그는 20일(현지시간) “올해 글로벌시장 배터리 설치량이 약 30% 증가할 것”이라며 “유럽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가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이며, 연료 공급 차질이 지속될 경우 성장세는 더 확대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미국 텍사스의 태양광 허브부터 중국 내몽골의 초원, 호주 시드니 북쪽의 옛 석탄발전소 부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대규모 배터리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라며 이 같은 분위기를 전했다.
또 “배터리 비용 하락과 데이터센터 전력수요 급증은 이미 시장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왔다”며 “여기에 중동전쟁으로 원유·LNG 가격이 급등하면서 발전비용이 상승하자 각국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안으로 배터리저장설비 투자를 급격히 확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배터리 투자가 늘어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비용 하락이다. 실제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위치한 워라타 슈퍼 배터리(발전소)는 4년 전보다 약 20% 낮은 비용으로 건설이 가능하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배터리 비용은 2018년부터 2025년까지 약 75% 하락했으며, 2035년까지 추가로 25% 더 떨어질 전망이다. 전력이 저렴할 때 저장하고 수요가 높은 시간대에 판매하는 ‘전력 차익거래’가 새로운 수익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수요증가에서 시작된 태양광 성공 공식 재현 = 전력수요 급증도 시장확대를 뒷받침한다. 인공지능(AI) 확산과 데이터센터 증가로 전력소비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기존 화력발전소는 건설 지연과 설비 부족으로 대응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태양광과 배터리를 결합한 전력공급 방식이 빠르게 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26년 신규 발전설비의 25% 이상을 배터리가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과 같은 글로벌 배터리 붐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전기차 공급망에 대한 투자로 배터리 공급이 과잉상태가 됐고, 이는 가격하락과 시장창출 효과를 가져왔다. 중국은 전력망용 배터리 설치량의 약 절반을 보유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러한 흐름은 2021년 이후 태양광 산업과 유사하다”며 “수요 급증 → 투자 확대 → 공급 과잉 → 가격 하락 → 대중화의 패턴”이라고 분석했다.
유럽 상황은 다소 다르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전력망 부담을 키우면서 가격 변동성이 커지고 있고, 발전량이 수요를 초과할 경우 출력 제한으로 손실이 발생한다.
유럽의 배터리 용량은 2025년 50GW에서 2026년 말 75GW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여전히 변수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공급 구조와 함께 전쟁으로 인한 금리 상승, 인허가 지연, 전력망 연결 문제 등은 투자 확대의 제약 요인으로 지적된다.
◆한국 취약한 전력시장 구조, 저장기술 확대 절실 = 한편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가격 변동성은 LNG 의존도가 높은 한국 전력시장 구조의 취약성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국내 전력가격은 LNG 발전이 계통한계가격(SMP)을 결정하는 구조인 만큼 이란발 리스크가 시차를 두고 전기요금 상승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배터리 기반 에너지저장장치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고 전력수급 안정성을 높이는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다만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이 중국 중심으로 재편돼 있다는 점은 또 다른 리스크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중동전쟁은 유가 쇼크뿐 아니라 전력 시스템의 중심축을 ‘연료’에서 ‘저장’으로 이동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은 저장기술 확대와 함께 전력시장 개편, 공급망 다변화를 병행해야 에너지 안보를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