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국왕 “반부패기구 수장 직접 고르겠다”
국왕이 꺼낸 반부패 인사 카드
연정 내부서도 “독립조사” 요구
말레이시아의 술탄 이브라힘 국왕이 23일(현지시간) 차기 반부패위원회(MACC) 수장을 직접 판단하겠다고 밝히면서,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 정부를 흔들어온 반부패기구 논란이 중대 고비를 맞았다.
현 수장인 아잠 바키 위원장의 임기가 5월 종료될 예정인 가운데 국왕이 공개적으로 차기 인선 의지를 밝힌 것은, 단순한 인사 문제를 넘어 말레이시아의 반부패 개혁 신뢰도와 권력구조 변화를 드러낸 장면으로 받아들여진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브라힘 국왕은 이날 왕실 공보실 성명을 통해 “이번 인사를 정치화할 필요는 없다”며 “부패와 횡령,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데 수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이어 “지금 시점에서 MACC를 이끌 최적의 인물이 누구인지 내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문의 중심에는 아잠 바키 위원장을 둘러싼 연쇄 의혹이 있다. 블룸버그는 지난 2월, 아잠이 금융서비스 회사 주식 1770만주를 보유했고 그 가치가 공직자 허용 상한선인 10만링깃(약 3730만원)을 크게 웃돌았다고 보도했다. MACC와 아잠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자산 신고와 주식 처분 절차도 규정에 맞게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다른 보도에서 MACC 고위 인사들이 일부 기업인들과 결탁해 특정 기업 경영권 장악을 도왔다는 “기업 마피아” 의혹까지 불거져 기관 전체의 신뢰 문제로 번졌다.
정치적 부담은 안와르 정부로 향했다. 안와르 총리는 초기에 아잠에 대해 “자기 일을 하고 있다”며 감쌌고, 정부는 특별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결과 공개는 계속 미뤄졌다. 현지 온라인 영문 매체 말레이메일에 따르면 안와르 총리는 지난달 3일 의회에서 조사 결과가 “이번 주 안에” 나올 수 있다고 밝혔지만, 이달 1일 파미 파질 통신장관은 주식 보유 의혹과 “기업 마피아” 의혹에 대한 조사가 아직 진행 중이며 추후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안와르 정부의 개혁 진정성에 대한 의문은 더 커졌다.
연정 내부 균열 조짐도 감지됐다. 집권연정의 핵심 축인 민주행동당(DAP)은 MACC 해명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왕립조사위원회(RCI) 설치를 요구했다. 고빈드 싱 데오 DAP 전국의장은 “효과적이고 투명한 조사를 위해 필요한 모든 권한을 갖춘 RCI 방식의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반부패는 말레이시아 정치의 핵심 개혁 의제이지만, 반부패 사정기관 수장을 둘러싼 논란으로 제도 자체의 독립성과 신뢰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국왕 발언이 더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레이시아는 9개 왕가 수장이 5년 임기로 순환해 국왕을 맡는 군주제를 운영하며, 통상 왕실은 정치와 거리를 둔 상징적 역할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정국 불안이 이어지면서 국왕의 재량권과 발언권은 점차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이번 인선은 안와르 정부가 반부패 개혁의 주도권을 유지할지, 아니면 국왕이 제도 신뢰 회복의 최종 심판자로 부상할지를 가르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