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패권, 이제는 유로달러가 지킨다
석유보다 강한 역외 달러망
익숙한 페트로달러 신화 깨져
‘페트로달러’는 오랫동안 달러 패권을 설명하는 대표적 단어로 쓰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이 석유를 달러로 팔고, 그 돈을 미국 국채에 재투자하면서 달러 중심 질서가 유지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 통념은 달러 체제의 작동 방식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달러 패권의 더 깊은 기반은 석유가 아니라 미국 밖에서 만들어지고 거래되는 달러, 즉 ‘유로달러’ 체제에 있다는 것이다.
2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실린 브렌던 그릴리의 에세이는 “페트로달러라는 것은 없다”는 도발적 표현으로 이 문제를 짚었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 자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중동 산유국의 달러 수입이 국제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돈이 달러 패권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역외 달러 금융망에 흡수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로달러(Eurodollar)는 유럽의 단일통화 유로(Euro)와 무관하다. 미국 밖 은행에 예치되거나 미국 밖 은행이 대출·예금 형태로 만들어낸 달러를 뜻한다. 런던의 은행이 달러 예금을 받고 달러 대출을 해주면, 그 달러는 미국 영토 밖에서 만들어진 달러가 된다. 미국 재무부나 연방준비제도(Fed)가 직접 발행한 돈은 아니지만,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달러로 기능한다.
이 구조가 중요한 이유는 규모 때문이다. FT는 국제결제은행(BIS) 자료를 인용해 미국 밖 은행의 부채로 잡힌 역외 달러가 약 14조달러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미국 내 연준과 상업은행이 보유한 달러가 19조달러를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달러의 상당 부분이 미국 밖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달러는 미국 통화이지만, 실제 달러 금융망은 미국 국경 밖에서 독자적으로 확장돼 온 것이다.
유로달러 체제는 세계 금융시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신흥국 기업이 달러로 빚을 내고, 무역업체가 달러로 대금을 청구하며, 은행들이 미국 밖에서 달러 자금을 조달하는 구조에서는 달러 유동성이 곧 세계 금융 여건이 된다.
미국 금리가 오르거나 달러 조달 비용이 뛰면 미국 밖의 은행과 기업도 압박을 받는다. 반대로 역외 달러 시장이 원활하면 세계 무역과 투자도 쉽게 굴러간다.
위기 때 이 구조는 더 선명해진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코로나19 충격 당시 연준은 주요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를 통해 달러를 공급했다. 미국 밖에서 만들어진 달러를 미국이 직접 통제하지는 않지만, 위기 때는 그 달러 체제가 흔들릴 경우 미국 경제도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러 패권의 핵심은 산유국과의 비밀 합의보다, 미국이 역외 달러 체제를 최종적으로 떠받칠 의지가 있느냐에 가깝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이 흔들리거나 일부 산유국이 위안화 결제를 늘린다고 해서 달러 패권이 곧바로 무너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너지 결제 통화의 변화는 상징적으로 중요하지만, 달러 체제의 본체는 훨씬 넓다. 세계 기업과 은행이 달러로 빚을 내고, 달러로 결제하며, 미국 밖에서 달러 신용을 계속 만들어내는 한 달러의 지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페트로달러는 달러 패권을 설명하는 익숙한 신화였다. 그러나 실제 금융시장의 언어로 보면 더 중요한 것은 유로달러다.
달러의 힘은 미국 안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 밖 은행들의 장부와 국제 무역의 관행, 그리고 위기 때 연준이 제공하는 금융 안전망에서 나온다. 달러 패권을 보려면 유전과 항공모함만이 아니라 런던과 역외 은행 장부를 함께 봐야 하는 이유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