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호르무즈 해협 카드’ 전면화
3국 돌며 72시간 외교전
의회 시한·중국 변수까지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이 핵 프로그램 협상보다 호르무즈 해협 재개방과 지역 안보 질서 재편을 우선 의제로 내세우며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과의 직접 핵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해상 통로와 안보 보장을 지렛대로 국제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27일(현지시간) 알자지라 보도에 따르면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은 최근 72시간 동안 파키스탄, 오만, 러시아를 오가며 연쇄 회담을 벌였다. 그는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셰바즈 샤리프 총리, 아심 무니르 육군참모총장 등을 만난 뒤 오만 무스카트로 이동했고, 이후 다시 파키스탄을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동했다.
이번 외교전의 핵심 의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호르무즈 해협의 항행 재개, 둘째는 지역 국가들에 대한 상호 안전보장, 셋째는 전후 질서와 새로운 안보 체제의 밑그림이다. 핵 농축이나 핵무기 문제는 후순위로 밀려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미국이 요구하는 ‘핵 선(先)타결’ 구도에 맞서 이란이 협상 의제를 넓혀 협상력을 높이려는 시도로 읽힌다.
백악관은 이란 제안의 구체적 내용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을 통한 협상은 하지 않겠다”며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합의만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란은 이미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며 압박 기조를 유지했다.
시간표도 촉박하다. 미국 내에서는 1973년 전쟁권한법(War Powers Resolution)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군사작전을 지속하려면 5월 1일까지 의회 승인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무제한 군사개입에 대한 경계론이 고개를 들고 있어 트럼프 행정부로서도 외교적 성과가 절실한 상황이다.
걸프 국가들의 태도 변화도 주목된다. 과거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당시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아랍국들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보복 충돌보다 해상 안정과 에너지 수출 정상화를 우선시하며 외교 해법에 무게를 싣고 있다. 특히 카타르와 오만은 항로 안전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존재감도 커진다.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갖고 있으며 이란 농축 우라늄 이전·관리 문제에서도 기술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다. 다만 미국의 제재 완화나 최종 합의를 대신 보장할 수는 없어 협상 촉진자 이상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은 변수는 미국의 선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호르무즈 우선 협상안’을 받아들여 단계적 합의에 나설지 아니면 핵문제 선결 원칙을 고수하며 압박 수위를 더 끌어올릴지가 향후 중동 정세를 좌우할 전망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