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정책실장 발언의 진실은…반도체 초과세수 사용처 공론화 제기
‘기술독점경제시대’ 과실, 어떻게 나눌 것인가
반도체 호황 따른 추가세수 25조~50조 추정
추가세수 활용방법 공론화 해보자는 문제제기
과거엔 단기사업이나 ‘지역별 나눠먹기’로 소진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SNS를 통해 던진 ‘초과세수’ 화두가 정치권과 경제계를 흔들고 있다. AI 시대 반도체 호황이 가져올 역대급 초과세수를 국민에게 환원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보수야권으로부터 “사회주의식 배급제”라는 거센 비난을, 진보진영과 학계로부터는 “AI 시대 양극화에 대비한 시의적절한 담론”이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김 실장의 주장은 기업의 이익을 강제로 뺏자는 차원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전통적인 ‘순환형 수출구조’를 넘어 지속적인 초과이윤이 발생하는 ‘기술독점적 구조’로 진입하고 있다는 분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여기서 예정된 ‘초과세수’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선순환시킬 것인지에 대한 설계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나랏살림의 주인인 국민에게 그 성과를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에 대한 ‘도전적 문제제기’인 셈이다. 또 국가재정의 주인이어야 할 국민들과 함께 ‘초과세수 활용법’을 논의해보겠다는 ‘국민참여 재정’에 대한 정부의 의지표명으로도 읽힌다.
◆초과세수 얼마나 될까 = 김 실장의 제안이 현실적인 힘을 갖는 배경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필두로 한 ‘반도체 슈퍼 사이클’과 이에 따른 유례없는 세수 호재가 있다.
13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올해 예상되는 초과 세수는 현재까지 집계된 것만 25조2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보수적인 수치로 보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 등 고부가가치 제품의 수요가 비선형적으로 폭증하면서, 올해 전체 초과 세수 규모는 50조원을 상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지난해부터 도입된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기업에 대한 법인세 중간예납 가결산 의무화’는 이러한 전망을 뒷받침한다. 과거에는 전년도 실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냈지만, 이제는 상반기 호실적이 즉시 세수에 반영된다. 2021년과 2022년 각각 61조원, 52조원의 초과 세수가 발생했던 전례를 볼 때, AI 인프라 수요가 누적되는 현 국면에서의 세수 오차는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초과세수 활용법’ 공론화 = 김 실장이 전날 SNS에 올린 글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의 골자는 ‘증세’가 아니라 ‘세수의 효율적 배분’에 있다. 그는 지금의 호황이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산업과 국가 구조의 재편’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전력 장비 등 AI 인프라에 필요한 ‘풀스택 제조 역량’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다. 이는 과거 ‘북해유전’을 발견한 것과 같은 구조적 초과이윤을 보장한다. 김 실장은 이 과실이 특정 기업이나 엔지니어 등 수혜층에만 집중되는 ‘K자형 격차’를 우려한다. 실제 반도체 대기업들은 수십년간 국민세금을 기반으로 한 국가재정의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최근 수년간에는 국가전략산업이라는 이유로 시설과 연구개발투자는 전액 세액감면을 받기도 했다. 이런 세제혜택 규모만 해도 연간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으로 추정된다. 김 실장이 반도체 초과세수의 과실을 국민들과 나눌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의 논지는 명확하다. “과거처럼 초과세수가 발생할 때마다 원칙 없이 단기 사업에 소진하거나 관행적으로 지방교부세 등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국가 차원의 전략적 활용 원칙을 세울 것인가”를 묻고 있다. 즉, 초과세수 활용처에 대한 국가적 설계도를 국민과 함께 그리자는 제안이다.
◆‘국민배당방식’도 검토해보자 = 김 실장이 제시한 ‘국민배당금’은 노르웨이의 국부펀드 모델과 맥을 같이 한다. 자원(기술독점적 이익)에서 나온 수익을 일시적·소모적으로 쓰지 않고 장기적 사회 자산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는 AI 시대의 성과가 전 국민이 반세기에 걸쳐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며, 그 과실의 일부를 구조적으로 환원하는 것이 ‘설계의 정당성’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국민배당금’이라는 명칭에 매몰되기보다 그 내용을 채우는 방식은 열어두고 있다.
그는 초과세수 활용처로 △청년창업 자산 형성지원 △농어촌 기본소득 및 노령연금 강화 △AI 시대 전환교육계좌 지원 △예술인 및 문화 창작 생태계 지원 등을 예시하기도 했다. 명칭에 얽매이기보다 초과 세수를 사회적 전환비용과 미래투자에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백가쟁명식 공론화를 거치자는 제안인 셈이다.
◆김 실장 주장에 대한 반론 = 하지만 이러한 구상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보수야권과 경제계에서는 즉각 ‘반기업 정책’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기업이 번 돈을 정부가 뺏어다 나눠주는 공산당식 발상”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역시 “국가가 법률로 정한 세금 이상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폭력”이라고 날을 세웠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 등 개별 기업의 이익을 직접 겨냥하는 듯한 뉘앙스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부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고, 주가 급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초과 세수가 발생한다면 나랏빚(국채 상환)을 갚는 것이 재정 건전성 확보에 우선이라는 목소리도 높다. 보수 언론은 “지금은 분배 논의보다 AI 경쟁력 확보를 위한 인프라 투자에 주력할 때”라며 시기적 부적절성을 꼬집었다.
◆적당히 나눠 쓰고 말 것인가 =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 실장의 문제제기는 시의적절하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초과 세수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추경재원으로 삼아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적당히’ 나눠 쓰는 관행을 되풀이해 왔다. 세수추계 오류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고, 예상되는 거대 재원을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어떻게 쓸지 공론화하는 것은 정부의 마땅한 책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시의적절한 문제제기, 공론화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오히려 “국가가 돈이 남을 때 주인인 국민에게 어떻게 돌려줄 것인가”를 묻지 않는 것이 무책임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이 화두를 던진 주체가 청와대 정책실장이라는 점은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비서인 정책실장은 통상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고 정제된 정책을 집행하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자리다. 학자나 정치권이 던질 법한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주제’를 선제적으로 제기, 시장에 불필요한 혼란을 주고 정치적 공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역할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제 공은 시장과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 논란이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대한민국을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산업국가’로 밀어 올리는 재정설계의 시작점이 될지 주목된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