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맥값 내렸는데 밀가루는 올랐다
상위 제분사 주도 6년 담합 … 공정위, 역대 최대 과징금
정부 보조금 받으면서 가격 인상 … 검찰은 임직원 기소
정부가 설탕·밀가루·전분당 등 생활물가와 직결된 원재료 시장 담합 단속을 확대하고 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21일 민생물가 특별관리 관계장관 TF에서 현 정부 출범 이후 약 20조원 규모 담합을 적발·제재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는 전날 공정위가 전모를 밝힌 밀가루 담합 사건이 대표 사례로 제시됐다. 국내 주요 제분업체들은 약 6년 동안 가격과 공급물량을 담합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가격 안정 보조금까지 지원했지만 제분업계는 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추구해 국민 신뢰를 저버렸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공정위는 20일 대한제분·CJ제일제당·사조동아원·삼양사·대선제분·삼화제분·한탑 등 7개 제분사에 담합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인 6710억4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가격재결정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들 업체는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밀가루 공급가격과 공급물량을 담합한 혐의를 받는다. 국내 B2B 밀가루 시장 점유율은 87.7%에 이른다.
공정위 조사 결과 담합은 대한제분·CJ제일제당·사조동아원 등 상위 3개사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2018년 말 대한제분이 농심 공급물량 확대를 위해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경쟁이 격화되자 상위 업체들이 가격 경쟁을 자제하고 물량을 유지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이후 담합은 중소형 거래처와 대리점으로 확대됐고 2021년 이후에는 전 제품 가격까지 공동 조정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의 핵심을 ‘원가 하락 방어형 담합’으로 보고 있다. 제분사들은 국제 원맥 시세 상승기에는 가격 인상폭과 시기를 합의해 원가 상승분을 빠르게 반영했고, 원맥 시세 하락기에는 가격 인하폭을 최소화하거나 인하 시점을 늦췄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제분시장이 원재료 공동 수입, 낮은 제품 간 변별성 등으로 담합 유인이 큰 구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3년 농심이 원맥 시세 안정을 이유로 1kg당 80원 가격 인하를 요구했지만 제분사들은 최소 인하폭인 20원만 반영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제 원맥값이 안정세에 들어간 뒤에도 제분사들은 환율 상승 등을 이유로 가격 인상을 합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 자료에 따르면 중력분 평균 공급가격은 2019년 12월 kg당 507원에서 2022년 9월 820원으로 61.6% 상승했다. 밀가루는 라면·빵·과자·국수 등의 핵심 원재료인 만큼 가격 상승 압력이 소비자 물가 전반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지원사업 기간에도 담합은 이어졌다. 정부는 2022년 하반기 국제 원맥값 상승에 대응해 밀가루 가격 안정 지원사업으로 제분사들에 총 471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한 기간에도 업체들이 가격 인상 시기와 인하폭을 논의하며 담합을 지속했다고 밝혔다. 정책 자금이 투입된 기간에도 담합이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책 실효성 논란도 제기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날 담합 업체들을 ‘제분업체 경영안정자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밀가루 가격에 대한 월별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검찰 절차도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1월 검찰 요청에 따라 7개 제분사와 담합에 가담한 임직원 14명을 고발했다. 검찰은 최근 전분당 담합 사건에서도 업체들이 화이트보드에 가격을 적어가며 입찰가격을 사전 조율한 정황 등을 확인하고 관련 업체와 임직원들을 재판에 넘겼다. CJ제일제당과 삼양사는 설탕 담합에 이어 밀가루 담합까지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공정위는 이번 사건에서 과징금 부과와 함께 ‘가격재결정명령’을 내렸다. 가격재결정명령은 담합으로 왜곡된 가격을 각 업체가 독자적으로 다시 산정하도록 하는 조치다. 이번 명령에 따라 7개 제분사는 의결서 송부 뒤 3개월 안에 담합 이전 경쟁 수준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밀가루 가격을 다시 정해 공정위에 보고해야 한다. 공정위는 앞으로 3년간 가격 변경 현황도 연 2회 보고하도록 했다. 공정위는 담합 전 수준으로 사업자 간 경쟁이 회복된 가격 정상화를 위해 가격재결정명령을 부과했다고 설명했다. 또 반복 담합 방지를 위해 담합 가담자 징계 규정 신설 명령도 함께 내렸다.
삼양사 관계자는 “이번 판결 전인 지난 2월 5일 소비자용과 업소용 밀가루 가격을 평균 4~6% 인하했고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 인하를 수시로 진행해 왔다”며 “앞으로도 공정위 지침과 시장 상황에 따라 적극적인 가격 정책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 안팎에서는 소수 업체 중심의 과점 구조가 유지되는 한 원재료 시장 담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공정위는 조사와 심의 과정에서 제분업계가 밀가루 가격을 최대 8.2% 인하했고, 빵·라면·과자 등 가공식품 가격 인하로도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전분당 담합 사건 심의도 7월 초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