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역사교육으로 민주시민 역량 기르자
인류 문명에서 ‘역사(historia, 史)’라는 분야가 등장한 이래 ‘역사’는 과거를 활용하여 현재와 미래를 돕는 유용성을 발휘해왔다. 전근대 시대에는 주로 통치권자를 위해 활용되었다면, 민주주의 시대에는 시민 대중을 위해 다양한 공공영역에서 활용된다. 시민 대중은 누구나 차별 없이 역사를 소비하고 향유한다. 그러는 가운데 공적 근거가 충분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부정하는 역사 부정도 나타났다. 민주주의는 불변의 결과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참여와 성찰을 통해 유지되고 발전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핵심 동력은 ‘민주시민’이며, 이들을 길러내는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가 역사교육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역사교육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민주, 자유, 평등, 평화를 중심으로 역사를 성찰할 때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진정한 ‘역사적 공감’이 일어난다. 홀로코스트나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국가 폭력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단순한 비극의 확인이 아니다. 이는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동의 책임감을 일깨우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 의식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갈등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공존과 협력을 이끌어 내는 민주시민의 역량이다.
역사교육은 민주공화국을 만들고 지켜온 온 가치를 존중하는 역사의식을 길러준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역사의식은 억압과 저항, 협력과 연대, 그리고 사회 변동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한국은 식민지배, 냉전과 분단, 전쟁, 쿠테타, 산업화, 민주화 등을 중첩적으로 겪은 유일무이한 국가다. 그래서 한국 근현대사는 복합적인 다양성을 띠었고, 이념의 칼끝에서 폭력과 억압으로 역사가 은폐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을 지켜 왔다. 3·1운동과 4·19혁명, 1987년 민주화운동은 단순한 정치 사건이 아니라, 시대마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원리를 지향한 시민적 실천 사례이다. 그 실천의 역사를 가치 있게 생각하는 역사의식은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민주시민의 역량이다.
민주시민의 중요한 자질은 비판적 사고력이다. 역사교육은 우리에게 수많은 선택의 순간과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준다. 과거의 인물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그 결정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현상을 다각도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특히 지배층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한다. 권력의 남용과 독재에 저항하여 인권을 옹호했던 역사를 배우며, 학생들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시민 의식을 기르게 된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가짜 뉴스와 혐오 선동 속에서 진실을 찾고 읽어내는 ‘미디어 리터러시’와도 직결되는 민주시민의 역량이다.
근현대사 역사정의에 대한 역사교육은 민주주의 회복과 지속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근현대사의 ‘은폐된 진실 찾기’와 ‘국가 책임 인정’ 등 역사 정의의 사회적·제도적 정착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요구해 온 시민들의 끈질긴 활동 결과였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었다. 그 결과 친일문제, 일제 강제동원, 제주 4·3사건, 국민 보도 연맹 사건, 5·18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과거사에 대한 수많은 조사보고서와 증언, 국가의 공식 사과 등 국가의 ‘공식역사’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과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 역사 보급과 리박스쿨 사태에서 보듯이 당연한 ‘공식역사’는 부정되었다. 역사정의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를 배워 민주주의 회복과 지속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역사의 정치 도구화와 역사 부정을 비판하는 사고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만드는 민주시민의 역량이다.
역사교육은 민주주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 시민의 참여와 공동체적 책임을 역사적 맥락에서 배우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미래세대인 학생이 스스로 역사 속 시민으로 사유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하고 미래세대가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사교육의 활성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지원
대림대 명예교수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