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계곡에 침몰한 ‘릴리움’
기후테크 육성에 진심인 유럽…마지막엔 결국 미국이 웃었다?
10년간 15억유로 쏟았지만 정부 보증 불발 … 특허 300건 결국 미국 아처 에비에이션에
우리는 흔히 유럽연합(EU)을 기후환경 선진국가로 꼽는다. 기후테크 육성 역시 미국보다 EU가 더 공격적으로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지막 승리를 거둔 건 미국이 된 사례가 나었다. 바로 독일 에어택시 스타트업 ‘릴리움(Lilium)’ 이야기다. ‘기술은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본은 미국이 완성한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 상징적인 사례다.
독일은 2024년 9월 ‘윈 이니셔티브(WIN-Initiative)’를 발족해 성장·혁신 자본 확충에 나섰다. 하지만 정작 자본의 절대량에서는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20일 프랑스 중앙은행의 ‘유럽은 어떻게 벤처캐피털 시장을 키울 수 있을까?’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23년 EU의 벤처캐피털(VC) 투자액은 890억유로인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은 1조유로 이상을 쏟아부었다. 유럽이 미국의 1/10도 안 되는 자본으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이 구조적 격차로 인해 막판에 기술을 다른 나라에 뺏긴 상징적 사례로 릴리움이 꼽히곤 한다. 2015년 뮌헨에서 출발한 릴리움은 헬리콥터처럼 수직 이착륙하면서도 제트기 수준의 효율로 비행하는 전기 수직이착륙기(eVTOL) ‘릴리움 젯’을 개발하며 ‘유럽판 하늘을 나는 택시’를 꿈꿨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10년간 15억유로에 달하는 투자를 유치했다.
하지만 정작 양산·상용화 직전 대규모 후속 투자가 필요한 죽음의 계곡 구간에서 자금줄이 끊겼다. 죽음의 계곡은 유망 기술이 시제품·인증 단계를 넘어 실제 양산에 들어가기 직전, 필요한 자금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투자 유치에 실패해 사업이 좌초하는 구간을 말한다.
2024년 10월 릴리움의 공식 발표 자료에 따르면, 독일 연방의회 예산위원회는 국책은행인 독일재건은행(KfW)을 통한 1억유로 대출에 대한 연방정부의 5000만유로 보증을 승인하지 않았다. 릴리움은 이어 바이에른주 정부와 5000만유로 보증에 대해 협상을 이어갔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결국 자회사인 ‘릴리움 GmbH’와 ‘릴리움 e에어크래프트 GmbH’가 파산 관련 자율관리절차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클라우스 로베 릴리움 최고경영자는 “예산위원회가 대출에 합의하지 못했고, 바이에른주 홀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릴리움과 경쟁사였던 미국 eVTOL 기업인 ‘아처 에비에이션’은 경쟁 입찰 끝에 릴리움의 약 300건에 달하는 첨단 항공 모빌리티 특허 포트폴리오를 1800만유로에 인수했다. △배터리 관리 △고전압 시스템 △비행 제어 △덕티드 팬 등 릴리움이 10년간 쌓은 핵심 기술이 상대적으로 헐값에 미국 기업 손에 넘어갔다. 독일 모빌리티 전문매체 ‘일렉트리브’에 따르면, 릴리움 인수를 노렸던 네덜란드 컨소시엄 ‘앰비셔스 에어모빌리티 그룹(AAMG)’은 자사의 최종 제안(3000만유로)보다 낮은 아처 에비에이션의 특허 인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깊은 실망감”을 표했다.
물론 원인을 하나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EU가 정책적 의지와 초기 기술력에서는 앞섰지만, 정작 스케일업 단계의 실탄이 부족해 힘겹게 얻은 결실을 미국에 넘겨줬다는 평이 시장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