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아세안의 핵심 가치는 헌장 1조 '아세안 중심성'

2023-12-15 10:34:02 게재

핵심 키워드는 4C - 공동체(Community) 헌장(Charter) 연계성(Connectivity) 중심성(Centrality)

정해문 전 태국 대사

아세안을 꿰뚫는 핵심 키워드는 4개의 씨(C)로 압축된다. 4C는 공동체(Community), 헌장(Charter), 연계성(Connectivity) 및 중심성(Centrality) 이라는 4개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를 나타낸다. 모두 아세안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프로젝트를 담고 있다. 이는 또한 아세안의 자아와 지향 목표를 외부 세계와 함께 나누는 창의 역할을 한다. 아세안 역외 인사들은 모두 이를 통해 아세안의 이념과 철학 및 작동 원리를 더 잘 간파하고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아세안 통합을 견인하고 주도하는 창의력과 힘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아세안 중심성은 대내외적으로 아세안의 결속과 단합 및 응집력을 보여주는 철옹성 개념이자 동아시아 지역협력에 있어서 아세안이 주도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자라잡고 있다.

◆한미일 정상회의도 '아세안 중심성' 지지 = 아세안은 현재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해 미국 EU 영국 러시아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11개 대화상대국과 연례 양자 정상회의 또는 고위급 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4개국이 포함된다. 정상회의 결과 발표되는 의장(당해 연도 아세안 의장국) 성명에 빠지지 않은 단골 메뉴가 '아세안 중심성과 통합 지지' 언급이다.

올 9월초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한-아세안 연례 정상회의 후 발표된 의장(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 성명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아세안 중심성과 아세안 주도 협의체에 대한 존중'이라는 표현으로 지지를 밝히고 있다. 또한, 미국-아세안 정상회의 후 발표된 의장 성명은 '아세안 공동체 구축 노력과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과 지지를 환영한다' 고 표현하고 있다.

지난 9월 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 18차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미국과 러시아 대표가 함께 참석해 공동성명까지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전쟁 발발이후 미국과 러시아 대표가 함께 참여한 회의는 매우 드물다. 아세안이 주도한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미국과 러시아를 모두 참석시킬 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정상회의는 아세안 10개국을 비롯해, 한국 중국 일본과 미국 러시아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총 18개국이 참여하는 국제회의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 리센룽 싱가포르 총리,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AFP=연합뉴스


이와 유사하게, 일본과 정상회의 후에도 '일본의 아세안 중심성 지지를 환영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난 8월18일 한미일 3국 정상은 캠프 데이비드 공동성명을 통해 아세안 중심성과 단합 및 아세안 주도 지역 구조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재확인한 바 있다.

◆2007년 채택 아세안 헌장 1조에 명시 =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표현이 아세안 문서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2007년 채택된 아세안 헌장 제1조에서였다. 1967년 아세안 창설 후 40년만의 일이다. 헌장 제1조는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인 지역구조 안에서 외부 상대와의 관계 및 협력을 주도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아세안의 중심성과 지도적 역할을 유지할" 필요성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중심성이라는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 이후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 주요 문서 및 회의와 대외 관계에서 강조되기 시작했다. 아세안을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학자들이 아세안 중심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 지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제시해 왔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주관적인 접근법을 보여주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부엔수세소 전 필리핀 외교차관은 2021년 발간 자신의 저서 '아세안 중심성'에서 아세안 중심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세안의 공식적인 정의는 아직 없다고 진단하면서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관점을 정리하고 자신의 해석과 나란히 비교하여 결국 이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한분의 아세안 학자는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발전시킨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다섯 가지 정의를 취합하여 분석하기도 했다. 즉, 아세안은 ⑴지역의 지도자이며 ⑵지역의 회의 주최자이고 ⑶지역의 중심이자 ⑷지역 발전의 원동력이며 ⑸일종의 지역 '편의시설' 이라는 설명이다. 이 다섯 가지 설명 중에서 최선의 정의를 선택하는 대신 그저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각각에 대한 사례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마무리 한다. 최근 들어와서 협력을 희망하는 외부 국가들이 늘어나면서 아세안은 마침내 일종의 틈새시장을 찾았고 아세안 중심성을 아세안 존재의 기본 원칙으로, 또 이 지역의 복잡한 힘의 대결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위한 담보물로 내세우면서 식민지 시대와 냉전 시대의 안 좋은 흔적들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아시아 정상회의 출범은 성공사례 = 부엔수세소 전 차관은 상기 저서에서 필리핀 외교관으로서 다른 아세안 회원국의 외교관을 비롯해 아세안의 대외 파트너들과 교류한 경험, 또한 주아세안 필리핀대표부 대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세안 중심성의 4가지 측면을 탐구하고 소개했다. 첫째, 역내 협력 문제에서 아세안의 지도적 입장을 통해 표현한 아세안 중심성. 둘째, 아세안 회원국 간 상호작용이라는 외교원칙으로서 나타난 자카르타 채널의 아세안 중심성. 셋째, 대외 파트너들과의 협력 문제에서 아세안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상호작용을 할 때 보여준 아세안 중심성. 넷째, 아세안에 대한 인식 수준을 높이고 아세안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데 도움이 되는 열망으로서의 아세안 중심성 등으로 요약된다.

한편, 마티 나탈레가와 전 인도네시아 외교장관은 2019년 출간 자신의 저서 '아세안은 중요한가?' 에서 아세안의 중심성과 지도력에 대해 "앞으로 펼쳐질 상황 전개에 단지 수동적으로 대응할게 아니라 긍정적인 자세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 책은 아세안이 현재와 미래에 걸쳐 어떻게 일관되게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충고를 담고 있다. 2005년 아세안이 성공적으로 동아시아 정상회의(아세안+한일중 등 총 18개국 참여) 출범을 주관했다는 사실은 아세안이 50년 동안 역내 구도를 정착해온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라고 마티 전 장관은 힘주어 강조한다. 즉, 아세안의 주요 활동 반경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섰다는 의미였다.

◆아세안 중심성 약화 우려에는 민감 반응 = 토미 고 싱가포르 외교부 본부대사는 지역협력을 버스로, 아세안을 버스 운전기사로, 주변국들을 버스 승객으로 각각 비유한 적이 있다. 아세안은 운전 속도나 목적지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모든 승객이 편안하게 느낄 수준으로 운전을 하기 때문에 주변국들이 아세안 버스에 기꺼이 탑승한다는 것이다. 아세안 이외의 다른 국가, 특히 강대국이 버스를 운전하면 자기 마음대로 난폭 운전을 할 수 있어 승객들이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이 동아시아 지역협력 회의를 주최하는 개념으로도 발전했다. 이 개념이 적용되는 것으로는 아세안+1, 아세안+3, 동아시아 정상회담(EAS), 아세안지역포럼(ARF), 아세안 국방장관회의 플러스(ADMM Plus)가 대표적이다. 아세안은 유엔과도 정기 대화를 개최하고 있다. 올 9월초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참석하에 아세안-유엔 정상회의가 자카르타에서 개최됐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아세안 중심의 지역협력체제 구축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향유해 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세안은 중심성을 훼손하거나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제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례로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가 지난 2008년 6월 아시아 태평양 공동체(Asia Pacific Community, APC)를 제안했을 때, 싱가포르 등 아세안 국가들이 극력 반대했다. 호주는 제안 내용을 계속 바꾸고 아세안 회원국과 대화상대국에 특사 파견 등 외교적 노력을 경주했으나, 결국 APC는 폐기됐다. 또 다른 예로 2021년 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의 쿼드 체제가 정상 레벨로 승격 출범하고 이와 동시에 쿼드 플러스가 거론되자 아세안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아세안 중심성 지지를 통한 관계 심화 =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아세안의 11개 대화상대국들은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민감성을 십분 인식하고 계기마다 아세안 중심의 지역협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 오고 있다. 대화상대국들은 아세안 중심의 지역협력이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으나 그간 성과를 이루었고 또한 이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세안은 대화상대국과의 관계에서 아세안 중심성 원칙을 계속 확인하고 있다. 한국과 아세안은 내년 대화관계 수립 35주년을 목전에 두고 아세안이 대화상대국과 맺는 최고 수준의 파트너십인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지난 40여 년간 한국과 아세안은 다층적, 다면적, 다차원에서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발전시켜 왔으며 무엇보다 양 지역 시민들의 상대방에 대해 갖고 있는 호감도와 편안한 느낌은 대단히 중요한 외교적 자산이라 하겠다.

우리는 계속해서 양 지역 협력의 잠재력 실현을 극대화 하면서 아세안의 핵심 이익인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통해 한-아세안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혜택을 양측 시민들이 더 깊이 체감할 수 있도록 이를 내실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