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증평공고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에 몸을 싣다
"20분 수업도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3시간 집중해요"
싸운 후 화해하는 과정은 참 민주주의 배우고 익히는 장(場)
"선생님 저 집에 갈래요" 지난 18일 저녁 7시 반. 잔뜩 화가 난 정일(가명 충북 증평공고 1학년)이가 짐을 싼 배낭을 메고 휴양림 밖으로 나섰다.
평소 학교에서도 티격태격 했던 같은 학교 건환(가명 고 1)이와 관계가 결국 학교 밖에서 터지고 말았다. 정일이는 일방적으로 맞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얼굴과 목에 상처가 났고 안경다리도 부러졌다. 인솔교사는 두 학생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학교폭력'으로 처리할지 말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때린 건환이는 정일이가 맞을 짓을 했다며 사과를 거부했다.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행사 진행 팀이 나섰다. 두 시간이 넘게 두 학생과 대화를 했다. 둘 다 억울함을 호소했고, 오래 묵은 감정과 가슴 속 응어리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둘 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다툰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마음이 찝찝해 사과하려 했으나, 표현방법이 서툴러 싸움으로 이어진 것으로 결론을 냈다.
함께 온 학생들은 두 사람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행사 진행 팀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과 밤이 깊도록 토론을 했다.
조원들은 "생각해보니 우리도 잘못했다. 평소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고 방관자로 지냈다"며 "두 사람이 화해를 하고 좋은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다툰 두 사람은 전체 조원들 앞에 나가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평생 좋은 친구로 지낼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원종혁 인솔교사(충북 증평공고)는 "두 학생 모두 가슴 속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귀중한 시간이었다"며 "싸운 학생뿐 아니라, 조원과 친구들이 모두 나서 화해시키려는 과정과 노력은 참다운 민주주의를 배우는 교육의 장(場)이었다"고 말했다.
◆숲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나다 = 지난 17일 충북 증평공고 학생 31명이 2박3일 일정으로 충남서천 '국립희리산 해송자연휴양림'으로 여행을 떠났다. 교육부가 주최(서울시교육청 주관)하는 '숲으로가는 행복열차' 첫 손님이다.
학교측은 참여학생 대부분이 '학교 부적응 학생'들이여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했다. 학교에서 짜낸 아이디어는 전날 증평 인근 휴양림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기차를 타는 것. 결국 학생들은 3박4일 프로그램에 참여한 셈이다.
이날 휴양림을 둘러싼 희리산 등산로와 정상(해발 329미터)을 다녀와야 하루 일정이 끝난다. 등산 시작 전 남녀 학생 서너명이 산에 올라가지 않겠다며 강하게 거부했다. 몸이 아파 한 발작도 움직일 수가 없다며 인솔교사와 진행자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결국 남녀학생 4명은 인솔교사와 함께 휴양림에 남기로 했다. 정상까지 가는 오르막길은 한 시간 남짓. 학생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누가 먼저 정상을 밟을 것인지 은근히 욕심을 냈다.
"등산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산에 간다고 하니 잘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도 됐고요"
"그런데 두 시간정도 걷는 게 별로 힘들지 않았고,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 기분은 정말 좋았어요" 천식과 아토피가 심한 장요한(고 2)군은 산행을 포기하려 했지만, 선생님 설득과 권유로 끝까지 해보기로 마음먹고 운동화 끈을 졸라맸다. 하지만 오르막길에 들어서자 숨이 찼고, 다른 친구들보다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정상에 20여분 늦게 도착했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일어나 박수 세레머니를 보냈다. 요한이는 머쓱해 하며 손을 흔들어 답했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다"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휴양림 숙소에 도착한 학생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토론을 했다. 주제는 '등산'.
"산에 올라가기 전에는 등산을 거부하며 선생님한테 대드는 선배가 대단해 보였어요. 저게 '짱'인가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내려오면서 선배의 행동이 잘 못 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몸이 아프다는 건 핑계고요. 산행을 거부하며 30분 이상을 허비하도록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민폐'라고 생각해요"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은 등산을 거부한 친구들이 잘못했다며 거침없이 비판을 쏟아냈다. 토론 소식을 전해들은 남녀학생 4명(등산 거부자)은 행사를 마치는 날까지 다른 친구들 눈치를 봤다.
◆소통과 생각 나눔을 실천하기 = 일찍 잠에서 깬 학생들은 숲 길 산책에 나섰다. 전날보다 훨씬 부드러운 모습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약초박사를 따라 약초 체험길에 나섰다. 한 학생이 벌레에 물렸다며 부어오른 종아리를 보여줬다. 프로그램을 맡은 최진규 약초박사는 "연고보다 자연에서 얻은 약재가 더 치료효과가 좋다"며 생강나무잎과 감태잎 등을 찧어서 부어오른 종아리에 붙였다. 한 시간 후 붕대를 풀자 벌겋게 부어오른 종아리는 깨끗하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산벚나무 열매인 버찌가 시력에 좋다는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벚나무 가지로 몰려들었다. 손과 입은 빨갛게 벚나무 열매로 물들었고, 몇몇 아이들은 입가에 열매를 문지르더니 '드라큐라 놀이'를 하자며 친구를 쫓아 다녔다.
감태나무 잎과 생강나무 잎을 덖어서 차로 만들어 마셨다. 서너명은 차 맛이 좋다며 부모님 몫으로 챙겼다. 숲 길 옆에서 뜯은 씀바귀며 각종 산나물은 씻어서 비빔밥 재료로 활용했다. 인솔교사는 "학교에 오면 잠자기가 일과인 아이들이 질문을 다한다"며 웃었다.
점심 식사 후 인디언텐트로 불리는 '티피텐트(Teepee-tent)' 짓기에 나섰다.
31명이 6개 조로 나눠 휴양림 계곡 옆에 '우리만의 공간'을 짓기 시작했다. 사전에 인디언들이 주거용으로 사용한 티피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조별로 설계도를 그리게 했다.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인솔교사와 프로그램 진행교사는 학생들 분위기나 그동안 행동으로 봐서 두 개 조는 완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교사들의 판단은 기우였다. 특히 서로 말을 섞지 않는 여학생 조는 4:2로 나뉜 상태여서 협력이나 소통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텐트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6명 모두의 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자 먼저 말을 건넸고 마지못해 집짓기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가까워졌다.
"학생들이 공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본 게 처음일 겁니다. 솔직히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특히 두 세 시간을 딴 짓(흡연 등)하지 않고 집중하다니, 이건 기적입니다" 인솔교사들의 평가다.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전애란 교사는 "티피짓기를 통해 구성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자신의 마음을 형태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기에 참여한 학생들 마음을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있고, 이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마음과 유전자 안에 자연에 대한 애착과 회귀본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생태학자 윌슨의 주장이 현실로 나타나는 과정을 증명하는 듯 했다.
◆욕설과 거친행동, 숲에 묻다 = 마지막 날 아침, 학생들은 휴양림 주변 청소에 나섰다. 학교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행동이다. 강요나 강제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교사와 스텝들은 "오늘은 학생들 욕설을 듣지 못했다"며 "저녀석들이 무얼 잘못 먹었냐"며 환하게 웃었다.
국립생태원을 방문한 학생들은 '신기하다' '해외여행을 온 기분이다' '펭귄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귀엽다' '프레디 독을 키우고 싶다'며 연신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학생들은 생태원 탐방의 핵심인 '개미왕국 건설 게임'에 푹 빠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별 경쟁이 심했다. 열외학생 없이 모두가 게임에 참여했고, 이를 지켜본 인솔교사는 미소를 지었다.
'개미왕국 건설게임'은 조별로 여왕개미 1명을 선출한다. 여왕개미는 날개옷, 개미 더듬이, 머리띠, 곤충 선글라스를 착용 후 결혼비행으로 수개미를 만나 저정낭에 정자를 받아온다.
이때 수개미는 여왕개미의 간단한 장기자랑을 감상 후 마음에 들 때 정자를 내어준다.
여왕개미는 헝겊주머니 안에 있는 알을 하나씩 꺼내 조원의 운명 결정짓는다. 일개미와 여왕개미는 게임에 참여하고, 공주개미와 수개미들은 응원했다.
양주영 국립생태원 교육운영부 계장은 "일개미와 여왕개미의 협동으로 알을 만들어 내는 게임으로, 알을 많이 만들어내는 팀이 우승한다"며 "여왕개미 왕국 건설, 개미사회의 협업과 분업을 이해하고 소통과 상대방 마음 읽기 등을 느끼고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임은 예상과 달리 여학생 조가 우승하는 이변을 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은 갈 때와 달리 시끌벅적 했다. 멘토들이 전하는 책 선물에 관심을 보였고, 옆자리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멘토로 참여한 최지언(25.충북대학교 미술교육대학원)양은 "생각보다 잘 따라줬다. 산행하면서 인내심, 자신감, 성취감을 느끼고 배운 것 같다. 말은 거칠지만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이해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본인 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이 나서 도와주려는 적극성을 보고 놀라웠다"고 덧붙였다.
기차가 조치원역에 도착하자 학생들은 귀가를 서둘렀다. 버스에 오르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돌아와 스텝과 멘토를 안아줬다. "쌤 고마웠어요. 잘가요" 몇몇 학생들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