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열차', 덕유산 설경(雪景)에 들다

"둘이 있으면 외로움이 1000분의1로 줄어들어요"

2015-12-21 18:29:16 게재

서울19개 중학교 24명 '동화 속 나라 여행'

"눈꽃 터널을 지나니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아요" "태어나 이런 눈꽃 세상은 처음 봐요" 꽁꽁 얼어붙은 영하의 날씨에도 아이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무주 덕유산 향적봉에 오르는 길에 하얀 눈꽃이 만발했다. 아이들은 욕 대신 '태어나 처음'을 자주 입에 올리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향적봉을 향해

 

눈꽃터널에서 사진찍기


지난 16일 올해 마지막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가 서울지역 19개 중학교 24명을 태우고 무주 덕유산국립자연휴양림으로 달렸다.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2박3일 일정을 잘 견딜까 걱정하며 서울역까지 마중 나왔다. 하지만 기우였다.

아이들은 눈밭에 구르며 눈싸움을 즐겼다. 민지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으로 들어가더니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찍는 눈도장'이라며 벌러덩 누웠다. 구경만 하던 아이들도 뛰어들었다. 학교에서는 '적응하기 힘든 학생'으로 분류됐지만, 숲에서는 지극히 '정상'생활을 했던 24명의 2박3일 일정을 따라 가봤다.

행복열차에 참여한 학생들이 16일 국립덕유산자연휴양림에서 눈싸움을 즐기고 있다.


말 문 닫았던 아이들, 방언하듯 질문 = 덕유산국립자연휴양림에 발목까지 쌓인 눈을 휴양림 제설차가 쉬지 않고 치웠다.

좁은 길은 휴양림 직원들이 싸리비로 쓸었다. 아이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숲 해설가 뒤를 따라 임도를 걸었다.

"쌤~ 나무는 왜 겨울에도 안 얼어 죽어요?" "산 속 짐승들은 뭘 먹고 살아요?" "밤에는 진짜로 귀신이 나오나요?" 질문이 초등학생 수준이다. 김미선 숲 해설가가 웃으며 조목조목 답을 해준다. 겨울에 활동을 하는 나무는 잎이 푸르고, 활동을 중단한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려 활동을 멈춘다고 말했다.
 

푹신하다

 

숲에는 많은 동식물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혜롭게 살아간다고 설명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공존과 배려가 왜 필요한지도 덧붙였다. 조별로 '친구 믿기'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처음 본 또래들과 친해졌다. 아이들은 눈을 감고 차렷 자세를 취한 다음 온 몸을 뒤로 넘겼다. 뒤에서 친구가 받아주자 환하게 웃었다.

명상 시간에는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차근차근 돌아봤다. 짧은 학교생활이지만 내가 부족했던 것들과 친구관계, 가족들도 떠올렸다. 저녁은 조별로 직접 요리를 해 밥상을 차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밥을 해봤다는 노 유원(가명 중2학년)군은 "친구들 소화를 돕기 위해 일부러 밥을 질게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호두를 까서 강사 손등에 문지르며 "쌤, 손이 거칠어요. 호두 기름이 피부에 좋아요"라며 웃었다. 인솔교사로 참여한 정효선(서울 강동 위센터) 상담사는 "학교에서는 종일 말이 없는 아이"라며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니 마음 문이 서서히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종훈(가명)이는 웃음을 잃은 아이였는데, 정말 많이 웃고 질문도 많이 하네요"라고 덧붙였다.
 

에코가방만들기 - 특허내고 상품개발할 것

"이야기 들어주는 친구 선생님이 좋아요" = 다음날 아이들은 '에코가방 만들기'에 도전했다. 가방 한쪽에 짙은 색 천 조각을 덧대서 휴대전화기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주머니를 만들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집중 또 집중했다. 유원이가 "쌤~ 바느질은 무슨 방식으로 해요? 홈질, 박음질, 감치기 어떤거요?"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강사도 놀라는 눈치다. "너 바느질 해봤어?" "초등학교 때 배워서 자신 있어요" 반면 진범(가명 2학년)이는 옆에서 엎드려 잠을 잤다. 신기영 강사가 다가가 살며시 깨웠다. "밤에 잠을 못 잤니? 피곤하면 좀 더 자. 천천히 해도 돼"

진범이가 잠에서 깨더니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만들었다. 휴대폰 주머니 입구에 잠자는 사람을 그렸다. 자신을 그렸다고 했다. 휴대폰 주머니가 이불이 된 셈이다. 옆에는 키 큰 나무를 그렸고, 나를 보호해주는 '휴식나무'라고 설명했다. 진범이는 "너무 졸려서 잤는데 선생님이 혼내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기다려 준다고 해서 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신기영 강사는 "꾸중이나 핀잔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화를 한 덕에 상처를 숨기지 않고 내면의 세계를 그림으로 잘 표현한 것 같다"며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연이가 가방에 큰 글씨로 심한 욕설을 썼다. 큰 나무 아래에는 검은색 물감으로 작은 사람을 그렸다. 자신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신 강사가 "힘들고 답답한 일이 많았지?"라며 "솔직하게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잠시 후 기연이는 노란색 물감으로 욕설을 조금씩 지워나갔다. 신 강사는 "상처 난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틀이 지나자 아이들은 '못해요'라는 말대신 '우리'나 '해볼게요'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마무리 시간이 다가왔지만 규리는 후드티셔츠를 둘러쓰고 가방을 공개하지 않았다. 신 강사가 친구들과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규리는 가방에 "하나가 아니라 둘이 있으면 외로움이 1000분의 1로 줄어든다"고 썼다. 신 강사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 오늘 진짜 죽었어, ㅋㅋ" = 선생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하나 둘 눈밭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두 패로 나뉘었다.

흰 면장갑을 낀 아이들이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했다. 공격 대상은 인솔교사, 강사, 멘토, 스텝들이다. 눈을 치우던 휴양림 직원들도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 눈을 던지고도 웃고, 맞고도 웃었다. 한참 후에는 맨손으로 눈을 뭉쳤다. 한바탕 눈싸움을 마치고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가슴에 품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밑장빼기 성공할까

아이들이 지르는 소리와 뜨거운 열기가 국립덕유산자연휴양림 골짜기에 가득했다. 함정아 서울 중부 위센터 상담사는 "정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와 부적응, 소외된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웃음을 찾아준 소중한 행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효정이는 할머니와 단둘이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기회가 아이들에게 또 올까요?"

무주리조트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곤돌라를 탔다. 승현(중2 가명)이는 고소공포증이 심하다며 눈을 감고 옆 친구를 꼭 껴안았다. 잠시 후 실눈을 뜨더니 곤돌라 아래로 펼쳐진 상고대를 향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설천봉에 내리자 칼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스태프들이 준비한 무릎담요를 아이들에게 둘러줬다. 담요를 뒤집어 쓴 아이들이 "피난민 같다"며 낄낄댔다. 잠시 후 향적봉 가는 길목에 핀 상고대를 본 아이들은 넋을 잃었다. 나무 가지마다 하얗게 핀 눈꽃 작품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이상래 서울교육청 학교생활교육과 장학관은 "'숲으로 가는 행복열차' 프로그램은 올해 학교폭력 가피해 및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희망의 좌표를 찍어줬다. 포기하려는 학생들이 마음 문을 열고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 됐다"며 "사랑과 관심이라는 처방만 있으면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본 기사는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 행사로 학교는 비공개,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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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성 기자 hsje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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