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스(미국 전 재무장관·하버드대 교수)가 연준의장 됐다면, 세계경제 지금과 달라졌을까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 '구조적 장기침체론' 통해 세계경제 진단과 해법 모색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 최신호가 진단한 주요국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현주소다.
이런 상황에서 미 연방준비제도 재닛 옐런(오른쪽 사진) 의장은 어떤 상황이든 극적인 요소를 빼버리는 중앙은행의 마법을 시행중이다. 옐런 의장은 "느리긴 하지만 경제조건이 점차 정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료 중시'(data dependence) 접근법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예측하기 어렵고 애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블룸버그는 "마치 발끝에 전등을 매달고 어두운 밤길을 헤쳐나가는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연준 의장을 놓고 옐런과 경합했던 하버드대 경제학교수 로렌스 서머스(왼쪽 사진)는 옐런처럼 참을성이 많지 않다. 2013년 옐런에게 연준 의장직을 내준 뒤 서머스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중앙은행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통화정책에만 의존하는 한 세계경제 성장을 되살리지 못할 것"이라며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인프라투자 등과 같은 정부의 강력한 재정적 부양책을 동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부터 '지적 싸움닭'이었던 서머스는 여전히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옐런이 맞는지 서머스가 맞는지는 아직 모른다. 옐런처럼 지루하리만큼 때를 기다린다고 다 틀린 것은 아니고 서머스처럼 집요하게 도발적이라고 해서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만약 미 경제가 앞으로 완만하게나마 성장한다면 옐런의 점진적 방법이 옳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안 좋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머스가 그같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연준에서 8년간 근무한 뒤 브라운대 거시경제학 교수로 재임하는 고티 에거트슨은 "만약 서머스의 가설이 옳다고 판명된다면 경제학 전반을 바꾸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향후 수십년간 거시경제학 정책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옐런 '지켜보자' 서머스 '행동하자'
지난해 11월 서머스가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에서 강연한 뒤 아담 포센 소장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 분야에 있는 우리 모두는 서머스가 제기한 난제에 답하기 위해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적었다.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가장 난해한 질문은 '세계 경제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냐'는 것이다. 미국의 지난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5%에 그쳤다. 유로존은 미국보다 상황이 나은 2.2%였다. 1.1% 성장에 그친 일본은 지난 4반세기 동안 불황기를 들락거리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한때 일본에만 해당하는 문제였지만 지금은 전 세계 공통의 난제로 등장했다. 세계경제 비관론은 장기금리 전망에 녹아들어 있다. 독일 10년 만기 국채의 연간 수익률은 0,13%에 불과하다.
블룸버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옐런과 서머스를 대상으로 연준 의장직을 저울질 하던 2013년 여름만 해도 서머스가 지금처럼 독창적 견해를 내놓으리라는 예상은 누구도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일리노이주 민주당 상원의원인 딕 더빈에 따르면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연준의 철학과 미래에 대해서 옐런과 서머스 간 차이는 없다"며 "둘 사이에 종이 한 장 끼워넣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력 면에서 두 명의 우열을 가리긴 힘들다. 옐런은 UC버클리대 하스경영대학원에서 노동부문 경제학자를 지냈고 1994년부터 연준 이사로 재직해왔다. 서머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 아래서 재무부장관으로 일했고, 하버드대 총장과 오바마 대통령 직속 국가경제회의 의장을 지냈다.
JP모건체이스 수석이코노미스트인 마이클 페롤리는 당시 "만약 둘의 차이가 있다면, 옐런이 보다 적극적인 연준 의장이 될 것으로 보였다"며 "미 경제가 확실하게 반등할 때까지 통화부양책에 헌실할 것으로 여겨졌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11월 옐런이 벤 버냉키 의장의 후임자로 낙점을 받은 이후 서머스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 자리를 옮겨 그 유명한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를 설파하기 시작한다. 구조적 장기침체는 대공황 당시 하바드대 경제학자였던 앨빈 한센이 주창한 말로, 경기회복이 미약해 성장의 과실이 맺히기도 전 사그라들고, 침체가 스스로 증폭해 빼도박도 못하는 고질적 실업상태를 만드는 상황을 이른다. 'secular'는 원래 '세속적'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순환적'(cyclicalc)에 반대인 '장기적'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한센의 구조적 장기침체 경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특수가 사라졌음에도 미 경제가 성장을 가속화하면서 잊혀졌다.
블룸버그는 "서머스가 그같은 개념을 학술적 논쟁의 장으로 다시 끌어들인 것은, 마치 할아버지의 다락방에서 케케묵은 코트를 꺼내 다시 입은 모양새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서머스는 IMF 강연에서 "구조적 장기침체 개념이 미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리고 내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건 아니겠지만 세계 경제는 향후 수년간 제로금리로 인해 경제활동이 만성적으로 억제되면서 경제성장이 잠재성장률 아래로 후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서머스의 요지는 세계 경제가 워낙 불균등하기 때문에 제로금리도 높은 수준의 금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당시 서머스의 강연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언론의 지대한 관심을 불렀다. 언론의 관심이 다소 주춤해지자 서머스는 자신의 블로그와 강연, 기고 등을 통해 구조적 장기침체론을 확산시켰다. 브라운대 에거트슨 교수와 함께 '일반균형이론'(general equilibrium theory)에 구조적 장기침체론을 결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일반균형이론은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는 전제 하에 특정한 시장 하나를 살펴보는 부분균형분석과는 다르게 상호의존적인 경제 전체를 놓고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세계경제의 실상은 서머스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침체가 오래 지속하면서, 경제순환 주기론보다는 서머스의 장기침체론이 옳게 보였다. 그는 "내 주장이 맞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고 말했다.
서머스는 세계 경제가 만성적인 수요부족과 그로 인한 저축과잉 상황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기타 산업국의 국민들이 노령화로 인해 소비보다 저축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 반면 미약한 성장의 과실은 극소수 부유층의 지갑으로만 쏠린다. 이미 돈이 많은 그들은 버는 돈을 다 쓸래야 쓸 수가 없다. 당연히 저축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축을 흡수해야 할 기업투자도 지지부진하다. 이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새로운 경제가 이전보다 자산투자에 덜 의존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버택시와 에어비앤비 등 공유경제모델은 자동차와 주택 등 기존 자산을 적극 활용하는 전법을 사용한다. 소프트웨어산업 역시 순수한 지식정보가 중요하다. 이전처럼 대규모 공장을 지어야 제품을 생산해내는 방식이 아니다. 성장률과 생산성 둔화는 투자를 줄이도록 만든다. 기업경영자들이 자본지출에 상응하는 수익을 낼 자신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금리는 대체적으로 하락추세였다. 금리는 물가와 마찬가지로 수요공급법칙을 따른다. 대출수요가 약해지고 예금저축은 늘어나면서 금리가 떨어진다. 한때 금리는 제로 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중앙은행과 유럽중앙은행은 성장세에 불을 붙이기 위해 '제로금리제약'을 무릅쓰고 금리를 마이너스로 낮췄다.
세계경제는 서머스 주장에 힘 보태
서머스는 연준의 지난해 12월 금리인상을 반대하긴 했지만, 제로금리와 마이너스금리가 주식과 주택시장 거품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를 지속 제기하고 있다. 수익에 목마른 투자자들이 조금이나마 높은 수익을 노리고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머스는 "재정정책이 주역으로 등장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투자측면과 저축측면 두 가지다. 우선 그는 정부가 미국의 허물어져가는 도로와 교량을 개보수하고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며 교육제도와 시설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고비용 프로젝트를 시행하면 훗날 삶의 질 개선이라는 효과를 보게 됨은 물론 과도한 저축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인프라 투자 비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서머스는 저축측면에서 세금제도를 개정해 한계소비성향이 큰 중, 저소득층 구성원에게 보다 많은 돈을 쥐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서머스의 주장은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8년간 시행하려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 정책과 유사하게 보인다. 전직 연준 경제학자인 아놀드 클링은 2014년 자신의 블로그에 "내가 보기에 서머스의 제안은 이론으로 가장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 의회는 재정부양책 냄새가 풍기는 그 어떤 정책에도 관심이 없다. 특히 현재의 워싱턴 정가의 정치인들은 현재 올해 말 대선이 끝날 때까지는 책상에 숨어있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서머스는 "나의 처방과 진단은 분리될 수 있다"고 대꾸한다. 즉 워싱턴 보수정치인들이 해법으로 내세우는 방식을 써서라도 상황을 타개하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수출을 늘리고 불필요한 규제를 줄이며 대폭의 세금감면을 통해 기업들이 공장을 짓도록 유인하라는 것이다.
서머스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 많은 소통을 해왔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보다 크게 생각하자'는 것. 연준은 전통적으로 경제순환주기를 관리하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한정해왔다. 반면 서머스는 순환주기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한다. 순환주기 개념은 '나쁜 상황은 곧 반전돼 좋은 상황을 이끈다'는 낙관론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서머스는 "생산성이 떨어지면 원래의 궤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해고된 노동자가 오랜 실직을 경험할 경우 이전의 기술을 점차 잊듯, 경제 역시 생산성 능력이 장기간 하락하면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입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기침체를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하지만 서머스는 향후 3년 내 미국 경제가 심각한 경기침체에 돌입할 가능성이 50%에 달한다고 예측하고 있다.
최근 서머스는 구조적 장기침체론에 '전염가능성' 개념을 보탰다. 무역과 투자가 글로벌화한 상황에서 어떤 나라의 경제침체가 주변국으로 전염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침체를 겪고 있는 한 나라는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화가치를 절하하면서 무역흑자를 내고 있다. 이 경우 무역상대국은 실업이 발생하고 무역적자를 겪게 된다.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라 불리는 이같은 이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서머스는 중앙은행이 경제주기에 집중하는 일을 멈추라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만 전력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대신 정부와 손을 잡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처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중앙은행들은 '생산성이 둔화하는 게, 소득불평등이 확산하는게 문제이지만, 그건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한다"며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생산성과 불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대처하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고 비판했다.
연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박사학위 소지 경제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따라서 '구조적 장기침체론' 같은 거대한 개념을 요모조모 따져보기에 이상적인 직장이다. 피터슨연구소 포센 소장은 "하지만 연준 학자들은 단기 경제전망과 통화정책의 메커니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옐런 의장의 최대 임무는 금리를 결정하는 공개시장위원회(FOMC)의 매파(강경파)와 비둘기파(온건파)를 중재해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는 금리정책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포센 소장은 "만약 당신이 FOMC 위원이라면 모든 발언에 대해 세세한 사전검토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은행, 정부와 통큰 공조 필요
금리의 향방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연준은 서머스의 예측방향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금리인상의 최종목표치에 대한 연준위원들의 중간예측치는 3.25%에 불과하다. 2012년부터 예견된 4.25%에 비해 1%p나 낮은 수치다. 하지만 옐런 의장은 의회에 재정부양책을 늘려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있다. 옐런 의장은 지난해 11월 프랑스은행 강연에서 "세제와 재정정책은 이상적이지 않다"면서도 "연준은 장기적으로 성장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정부의 개입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옐런 의장은 구조적 장기침체론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 거리두기 전략을 취하고 있다. 반면 서머스와 버냉키, 유럽중앙은행 마리오 드라기 총재 등의 스승이자 현재 연준 부의장인 스탠리 피셔는 "근본적인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며 구조적 장기침체론에 보다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경제학술대회에서 피셔 부의장은 "구조적 장기침체 가설은 서머스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이론"이라고 언급하며 "금리가 장기간 낮은 상태로 유지될 것이라는 서머스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장기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지출을 통해 저축과 투자의 불균형을 해결하자는 서머스의 주장에도 동의했다. 피셔 부의장은 "구조적 장기침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투자에 비해 저축이 과도하게 많고, 금리가 매우 낮으며, 만성적으로 수요가 부족하다는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금리가 마이너스 영역으로 진입한 현 시대, 경제학의 모든 진실은 누구나에게 열려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경제학 박사학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지난 50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하지만 해답은 변했다. 서머스는 "그 농담이 현재 세계경제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블룸버그는 "서머스는 대격변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