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중립 IMEC(대학간 초소형전자공학센터), 미중갈등에 곤혹

2021-09-29 12:29:21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5500억달러 반도체산업 중심에 있는 두뇌집단"

벨기에 뢰번시는 일반 대중에게 맥주회사 '스텔라 아르투아'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도체기업들 사이에선 '대학간 초소형전자공학센터'(IMEC)의 본사건물이 있는 곳으로 각인돼 있다.

IMEC의 땅딸막한 건물 외관은 금속으로 덮여 있다. 소형회로가 식각된 실리콘웨이퍼 이미지를 풍긴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반도체 시제품을 만드는 30억달러 규모의 파일럿라인이 웅장한 저음을 낸다. 위층 사무실엔 수백명의 엔지니어들이 반도체의 미래를 일구기 위해 땀을 흘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IMEC은 미국의 인텔처럼 반도체를 설계하지도,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처럼 반도체를 제조하지도 않는다. 또 네덜란드의 ASML처럼 정교한 반도체 장비를 만들지도 않는다"며 "IMEC의 과제는 5500억달러 반도체산업의 모든 이들이 이용하는 노하우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전했다.


IMEC은 전세계 95개국 5000명이 넘는 과학자들과 협업하고 600개 이상의 반도체기업들, 유수의 대학들과 글로벌 연구개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전세계 반도체 품귀 현상에서 볼 수 있듯, 현대경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동시에 현대 지정학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IMEC은 지구상 모든 산업 연구개발센터 중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IMEC CEO인 뤽 반 덴 호브는 자사를 '반도체업계의 스위스'라고 칭한다.

IMEC은 1984년 뢰벤가톨릭대 전자공학자 그룹들이 주축이 돼 설립했다. 이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연구개발에 집중했다. IMEC은 설립 초창기 벨기에 플라망 지방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오늘날 IMEC은 재정중립성을 유지한다. 어떤 단일 기업이나 국가도 IMEC 예산의 절대적 지분을 가질 수 없는 재정구조를 갖췄다. 가장 큰 몫은 벨기에 정부로 약 16%를 차지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지원도 4%를 넘는 경우가 없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협력기업들과 함께 연구개발에 나서 반도체기술 범위를 확대하고 매출원을 다각화하면서도, 표준연구계약기간을 3~5년으로 제한해 특정 기업에 휘둘리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한다"며 "덕분에 IMEC은 특정 기업이 아닌, 반도체업계 전반의 제조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에 집중한다"고 전했다.

적절한 사례는 극자외선 리소그래피(EUV) 장비 개발이다. EUV장비는 고출력 레이저와 용융 아연, 극도로 부드러운 거울들을 다뤄야 하는 매우 세심한 과정을 포함한다. 극자외선을 발생시키는 버스 크기의 모든 기계들은 네달란드 ASML이 만든다. 그리고 TSMC와 삼성전자가 사용한다.

아이디어를 현실화해 EUV 장비를 개발하는 데에만 20년이 걸렸다. IMEC은 그 과정에 중매자 역할을 맡았다. EUV장비는 다른 기업들이 만든 장비세트와 물 흐르듯 끊김없이 연동돼야 한다.

선진 장비제조사들은 자사의 지적재산권이 반도체 거대 기업들의 지배력에 묶이지 않고 순환되길 원한다. 반면 거대 기업들은 참신하고 혁신적이지만 고비용의 개발과정을 거쳐야 하고 조만간 구식이 될지도 모를 아이디어에 선뜻 거액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는다. 중립적인 IMEC은 양쪽 편의 가운데에서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IMEC은 필요한 모든 장비를 한 곳에 모은 뒤 제조업체들이 다른 기업들과 보조를 맞춰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했다. 이 장에 참가한 모든 기업들은 IMEC에서 창출한 지적재산권에 대한 지분을 얻는다. 반 덴 호브 CEO는 "반도체산업 발전은 지식의 자유로운 교환 덕분에 가속화됐다. IMEC은 전세계 모든 이들의 아이디어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협업모델은 더 많은 기업들을 끌어모았다. 스타트업에서부터 반도체제조 스타기업인 ASML, TSMC에 이르기까지 현재 수백개의 반도체기업들이 IMEC에서 협업하고 있다. 인텔의 CEO 팻 겔싱어는 IMEC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IMEC은 연구개발 계약과 시제품 제조, 설계 서비스 등에서 매출을 얻는다. 참여기업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난해 IMEC의 매출은 2010년 대비 2배 올라 6억7800만유로(7억7300만달러)에 달했다. IMEC의 연간 매출액은 거대 자선단체인 포드재단 또는 미국암학회의 매출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리고 반도체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대략 같은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그래프 참조).

굵직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갖고 있는 미국과 지난해 3780억달러 규모 반도체를 수입한 중국은 사안마다 갈등을 빚고 있다. 이는 IMEC이 지켜온 중립적 전통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반도체 자급자족을 꾀하며 업계에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들은 기술과 장비 수출통제를 통해 중국 기업들을 배척하고 있다. 이는 IMEC이 중국 반도체기업들과 협력할 여지를 크게 줄여놓았다.

IMEC은 과거 글로벌 이동통신 장비제조사 화웨이, 중국 최대 반도체제조사인 중신궈지(SMIC)와 함께 일했지만, 지금은 공문서에만 기록으로 남았다. IMEC에서 일하는 중국 국적 과학자들은 전체의 3.5%를 차지한다. 국가별로 치면 5위 그룹이다. 미국은 1.5%에 불과하다. IMEC은 중국 상하이에 지사를 두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IMEC 본사건물에서 중국 반도체장비는 눈에 띄지 않는다. IMEC은 "중국의 몇몇 기업들과 협업계약을 맺었지만 민감한 기술은 아니다. 우리는 현재 유럽과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지침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 덴 호브 CEO는 "IMEC은 중국의 전도유망한 장비제조사들과는 주요한 협업 계약을 맺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반도체제조와 관련한 글로벌 노하우가 중국에 덜 유입되고, 중국에서 연구개발한 노하우가 전세계에 덜 유출된다는 것은, IMEC이 주도하는 반도체 관련 글로벌 기술베이스에 더 이상 중국 과학기술자들의 아이디어가 통합될 수 없다는 의미다.

서구와 중국의 반도체 기술영역 사이에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IMEC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대신 IMEC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연구개발하는 일이다.

IMEC과 협업하는 독일 반도체기업 '쥐스 마이크로텍'은 3D이미지를 통해 수많은 프로세서를 나란히 삽입할 수 있도록 반도체를 스캔하는 장비를 개발했다. 나노미터 규모의 이 작업은 매우 성가진 것이었지만, 쥐스 마이크로텍의 장비 개발로 효율성이 매우 높아졌다.

IMEC의 의료기술 부문을 담당하는 피터 퓨만스는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DNA 염기서열 분석을 수시간에서 수분으로 크게 단축시킬 수 있는 맞춤형 실리콘칩 시제품을 개발해 계약사에 인도했다.

IMEC 수석과학자인 자비에 로텐버그는 반도체 기반 초음파 센서를 개발중이다. 현재 쓰이는 포켓용 스캐너와 달리 단 한번의 스캔으로 인체의 모든 곳을 고화질의 필름으로 인화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같은 연구개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IMEC의 중립적 아이디어 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하지만 중립국 스위스처럼 IMEC이 반도체 지정학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일은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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