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전쟁, 칩 패키징으로 확대

2023-11-22 11:00:14 게재

한계 부닥친 칩 크기 경쟁, 첨단패키징으로 돌파 시도 … 블룸버그 "반도체산업 변곡점"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전쟁이 최첨단 칩 제조에서 반도체를 조립 포장하는 패키징 부문으로 확대되고 있다.

21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바이든정부는 최근 30억달러 규모의 국가 첨단패키징 제조 프로그램 계획을 발표했다. 미 상무부 로리 로카시오 차관은 20일(현지시각) 모건주립대에서 열린 관련행사에서 "2020년대 말까지 대규모 패키징 시설을 여럿 만들어 아시아 공급라인 의존도를 줄이겠다"고 말했다.

백악관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제조의 모든 부문에서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며 "첨단패키징은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분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첨단 패키징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중국 역시 미국의 제재대상이 아닌 패키징 분야를 활용해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하이엔드칩 제조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 성조기와 중국 오성홍기를 배경으로 중앙처리장치(CPU) 반도체칩이 놓여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기술분석업체 '티리아스 리서치' 설립자 짐 맥그리거는 "패키징은 반도체 혁신의 새로운 기둥으로, 업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며 "아직 최첨단 칩 제조 역량을 갖추지 못한 중국의 경우, 패키징에서 더 쉽게 성장할 수 있다. 패키징은 미중 간 기술격차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정부, 30억달러 규모 국가주도 개발

칩에는 수많은 미세 전기회로가 집적돼 있지만 그 자체로는 반도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패키지 공정은 칩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외부와 전기적으로 연결하고, 외부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 반도체가 발산하는 열을 효율적으로 배출하도록 발열을 제어하는 것 역시 패키징 영역이다.

최근까지 패키징 사업은 반도체업계가 나중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미국은 전세계 패키징 생산능력의 3%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주로 아시아에 아웃소싱했고, 중국이 주요 수혜국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첨단패키징이 화두가 됐다. 인텔은 경쟁력 회복 전략의 핵심분야로, 중국은 자국 반도체 생산능력 확충 수단으로, 미국은 반도체 자급자족을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첨단패키징을 바라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후공정(백엔드) 사업으로 간주되는 조립과 테스트, 패키징은 10억분의 1미터 단위로 측정되는 기능을 갖춘 칩을 만드는 선공정(프론트엔드) 사업보다 혁신이 적고 부가가치가 낮다. 하지만 반도체업계가 '변곡점'이라 부르는 새로운 기술로 칩을 결합하고 적층해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면서 패키징 정교함의 수준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

첨단패키징만으로 중국이 미국의 첨단 반도체 능력을 따라잡기는 어렵다. 하지만 서로 다른 칩을 긴밀하게 연결해 더 빠르고 저렴한 컴퓨팅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경우 중국은 한편으로 칩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는 비싸고 수량도 제한적인 최신 칩 기술을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배터리관리 및 센서제어와 같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칩을 만드는 데는 더 오래되고 저렴한 기술을 사용해 전체를 강력한 패키지로 결합할 수 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기술분석가인 찰스 슘은 "패키징은 중추적인 솔루션"이라며 "단순히 칩 처리 속도만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칩 유형을 원활하게 통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 반도체 제조환경을 재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2015년 발표한 '중국제조2025'를 기점으로 반도체 패키징 기술을 전략적 우선순위로 삼아왔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은 전세계 조립, 테스트 및 패키징 시장의 38%를 점유하고 있다. 후공정 시설 숫자로도 세계 최고다. 중국 조립·테스트 기업인 창텐과기(JCET)는 대만 ASE, 미국 앰코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중국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프랑스 싱크탱크 몽테뉴연구소의 중국 전문가 마티유 뒤샤텔은 "중국의 경우 첨단패키징은 미국의 기술이전 제한을 우회하는 한가지 방법이었다. 지금까지는 누구나 투자할 수 있는 안전한 분야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마트폰 표준 되면 수요 100배 커져

패키징에 갑자기 관심이 쏠리는 이유 중 하나는 AI 애플리케이션에 필요한 고출력 반도체 수요 때문이다. '칩 온 웨이퍼 온 서브스트레이트(CoWoS)'로 알려진 특정유형의 패키징 공급 부족으로 엔비디아의 AI 칩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 CoWoS는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반도체 칩을 웨이퍼 상에서 상호연결한 뒤 패키지 기판에 올린다는 뜻이다. TSMC에서 개발해 특허등록한 패키징 공정이다.

엔비디아의 주요 칩을 제조하는 TSMC는 올여름 병목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패키징공장에 30억달러를 투자했다. TSMC CEO C.C. 웨이는 3분기 실적발표에서 "내년 말까지 CoWoS 용량을 2배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TSMC뿐만이 아니다. 마이크론은 인도에 27억5000만달러 규모의 후공정 시설을 건설중이다. 인텔은 폴란드에 46억달러 규모의 조립·테스트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고 말레이시아의 첨단패키징 시설에 약 70억달러를 투입했다. 한국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미국 패키징시설에 15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컨설팅기업 맥킨지는 데이터센터와 AI 가속기, 가전제품용 고성능칩 등 분야에서 첨단패키징 기술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증권사 제퍼리스는 지난 9월 보고서에서 "첨단패키징을 사용하는 칩의 출하량이 향후 18개월 동안 10배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 기술이 스마트폰 표준이 되면 100배까지 치솟을 수 있다"며 "이 기술이 반도체업계에 지각변동을 몰고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

패키징에 대한 관심은 최첨단 칩이 물리학의 한계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칩은 지난 50년 동안 생산기술의 발전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개선됐다. 2년마다 2배의 트랜지스터를 절반의 비용으로, 2배의 클럭 속도로, 더 낮은 전력 수준으로 제공했다. 현재 칩에는 수백억개의 초소형 트랜지스터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같은 개선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반도체업계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첨단패키징기술에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다. 실리콘 한 조각에 더 많은 소형부품을 집어넣는 대신, 동일한 패키지에 여러개의 칩들을 촘촘히 묶어 제품을 만드는 모듈식 접근방식을 쓰고 있다.

칩 패키지에 사용되는 공구를 만드는 네덜란드 'BE 세미컨덕터 인더스트리스'의 기업가치는 지난 1년 동안 2배 늘어 약 98억달러에 달한다. 올 하반기 반도체산업 침체에도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를 2배나 앞질렀다. 물론 첨단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기계를 거의 독점하는 네덜란드 ASML 시가총액이 2500억달러에 육박하는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작은 규모다.

인텔이 독일 동부도시 마그데부르크에 최첨단 칩 제조공장을 짓기 위해 투자하는 돈은 300억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겔싱어 CEO는 "마그데부르크공장보다 첨단패키징 능력을 갖춘 46억달러 규모 폴란드공장이 사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패키징서 중국 대체 어려워

중국 기업들도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중국 최대 칩 제조업체로 화웨이의 야심작 메이트60프로에 탑재된 7나노미터 칩을 만든 중신궈지(SMIC), 반도체설계자산(IP) 선도기업 베리실리콘, 화웨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은 외국의 첨단 선공정 프로세스에 의존하는 대신, 첨단패키징 프로세스를 활용해 성능향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조립, 테스트 및 포장(APT) 등 후공정 서비스를 제재하게 되면 국가안보 위험을 줄이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채 오히려 반도체 공급망을 혼란에 빠뜨리는 역효과를 낸다고 보고 대중국 제재분야를 선공정 제조로 좁혔다. 미국 상무부 국립표준기술연구소는 지난 9월 "중국 APT 서비스는 현재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하고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며 "쉽사리 대체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블룸버그는 "바이든정부가 애리조나와 텍사스에 첨단 칩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TSMC와 삼성전자 등을 유치했지만 이런 사실이 반도체 자립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이들 공장에서 생산되는 첨단 웨이퍼는 결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로 보내 패키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IBM 부사장인 잭 헤르겐로터는 "그동안 첨단패키징은 투자측면에서 상대적으로 간과된 부문이다. 이제 북미에 첨단패키징 허브를 구축하는 일이 절실하다"며 "단기적으로 미국 패키징 용량을 전세계 용량의 10~15%까지 늘리고, 10년 내 25%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