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 비자금 증여, 법원서 인정되면 안돼”
‘노태우 비자금’ 최-노 이혼소송서 재등장 … ‘재단 분할’ 통해 사유재산 인정 노려
시민단체 고발, 검찰 수사 ‘지지부진’ … 대법원 판단따라 정경유착 영구 차단 효과
지난해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이 다뤄졌다.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은 지난 1997년 노 전 대통령이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은 후 2397억원이 국고로 환수됐고, 2013년 미납 추징금 230억원을 완납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런 ‘노태우 비자금’이 대법원 판결로부터 28년, 추징금 완납 11년 만에 ‘은닉 비자금’이란 또 다른 모습으로 재등장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배우자 노소영씨의 이혼소송에서 등장한 작은 메모지에서 시작된 ‘은닉 비자금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노 전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 나비아트센터 관장은 물론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 등 일가를 잇달아 검찰에 고발했다. 특히 법원이 이혼소송 차원을 넘어 정경유착의 고리를 영구히 차단하고 불법 비자금 편법 증여를 막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7일 시민단체들에 따르면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환수위)는 최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노 관장과 노 원장 등이 돈세탁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고 세금을 포탈한 정황이 있다”며 고발장을 냈다.
이들은 고발장에서 “검찰은 조속히 노태우 일가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며 “특히 노 원장은 해외와 국내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세탁해 온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환수위는 “자체 조사를 통해 노소영 등 노태우 일가의 자금 운용이 여러 면에서 석연치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드러난 불법 비자금 최소 1000억원 이상 = 이번 고발장 접수에는 시민단체들의 잇단 고발에도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판단이 한몫을 했다.
지난해 노 관장은 최 회장과 이혼소송 2심에서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SK 선대 회장 등에게 ‘맡긴 돈’ 904억원의 존재를 공개했다.
이는 1995년 비자금 수사 당시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노 전 대통령 일가가 은닉한 비자금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약 4600억원에 달하는 이른바 ‘6공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중 기업들에게 ‘뇌물’로 받은 2682억원은 추징됐으나 나머지 금액은 오리무중이다. 이런 가운데 노 전 대통령 배우자인 김옥숙 여사가 딸인 노 관장 이혼소송에서 90년대 초 선경(SK 전신)측에 300억원을 전달했다며 메모를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환수위는 지난해 10월 7일 서울중앙지검에 김 여사와 노 관장을 고발했다. 또 같은 달 14일에는 5.18기념재단이 김 여사와 노 관장 남매에 대해 “은닉재산을 상속받고도 신고하지 않은 건 범죄수익은닉규제처벌법 위반”이라며 대검찰청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검찰은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에 배당하고 수사를 개시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환수위와 5.18 기념재단 관계자들을 고발인 신분으로 2차례 불러 조사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고발인 조사를 마친 검찰이 의혹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피고발인인 노 관장 등을 직접 조사할 것으로 예상했다.
심우정 검찰총장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범죄수익은닉죄 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본 범죄가 입증돼야 한다”면서도 “그 부분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며 수사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기대감이 컸다.
검찰이 확인해야 할 비자금 규모는 최소 1000억원 이상이다.
정청래 국회 법사위원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드러난 노씨 일가의 은닉 자금은 노 관장이 이혼소송 과정에서 법원에 제출하면서 확인된 김 여사의 904억원 비자금 메모, 2016년부터 2021년까지 김옥숙 여사가 아들 노재헌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에 기부한 147억원, 2023년 노태우센터에 출연한 5억원 등이다.
◆‘봐주기식 수사’ 재현 우려 목소리 = 하지만 검찰은 이후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김근호 환수위 사무국장은 “고소장 제출의 발단은 노씨 일가가 공개한 메모장으로, 이는 스스로 비자금 은닉을 시인한 것”이라며 “현재 국내에 있는 노소영씨를 불러 자금의 성격이라도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고발장 접수도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의미가 포함됐다”며 “피고발인 조사여부를 지켜보면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시위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과거와 같은 ‘봐주기식 수사’를 우려하는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지난 국감기간 “검찰의 봐주기 수사로 인해 ‘노태우 불법 비자금’이 환수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007년부터 2008년 검찰과 국세청이 김 여사가 차명으로 은닉하던 보험금과 장외주식 등에 대한 진술서·확인서를 받고도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김씨는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차명으로 농협중앙회에 210억원의 보험료를 납입했다”며 “1998년 904억원 메모를 작성한 직후이며, 추징금을 미납하고 더 이상 돈이 없다고 호소하던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법원이 불법자금 증여 인정해선 곤란 = 앞서 이혼소송 항소심 법원은 비자금 300억원을 근거로 1조3800억원에 달하는 재산분할을 결정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법으로 축적한 재산에 대한 상속분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 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법조계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최 회장과 노 관장 이혼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단의 중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대법원의 역할에 따라 신군부의 숨은 불법 비자금을 다시 한 번 공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고환수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가능하다.
김 국장은 “노소영, 노재헌씨는 노태우 불법 비자금을 관리해 온 사실상의 비자금 상속자들”이라며 “이들은 범죄수익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불법적으로 증식해 온 공범”이라고 비판했다.
2심 판결은 은닉 비자금을 사실상 노 관장 재산으로 인정한 것이라 대법원이 이를 확정하면 불법자금의 증여를 법원이 인정하는 것이어서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현행법상 범죄행위자의 사망 등으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을 땐 불법적으로 축적한 재산을 몰수하거나 추징하는 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비자금 실체가 밝혀지면 노 전 대통령이 납부한 ‘추징금’과는 다른 돈이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가 이미 사망한 범죄자로부터도 범죄수익을 거둬들일 수 있게 하는 ‘독립몰수제’ 도입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국회에도 독립몰수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돼 계류돼 있어 300억원의 성격을 밝혀줄 대법원과 검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소송은 단순한 이혼소송이라기보다는 신군부의 내란이라는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를 치유하고 정상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대법원이 법리만 적용하는 기계적 판단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경유착이란 어두운 고리를 영원히 끊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