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단수’에 발목 잡힌 행안부·소방청
내란사태 직접개입 의혹에 당혹
재난대응기관 업무 차질 우려도
12.3내란사태와 관련 비상계엄 ‘언론사 단전·단수 지시’ 논란이 행정안전부와 소방청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각종 사건·사고가 잇따르면서 재난대응에 주력해야 할 주무부처이지만 전 장관과 현 청·차장이 단전·단수 지시 논란에 휘말린 탓에 두 기관 모두 내부 혼란을 겪고 있다.
19일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전날인 18일 경찰이 이상민 전 장관의 세종·서울 집무실과 허석곤 소방청장, 이영팔 소방청차장 집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서자 조직 내부가 심하게 술렁이고 있다. 이번 내란사태와 무관할 줄 알았던 행안부와 소방청이 단전·단수 지시 논란으로 개입 여부를 의심받게 된 탓이다.
행안부의 경우 단전·단수 논란 이후 이 전 장관이 이번 내란사태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논란이 불거지기 전까지는 이 전 장관의 비상계엄 선포 사실 인지여부를 반신반의 했다. 한 고위간부는 “당일 울산에서 회의 도중 올라가면서도 어떤 지시나 언급이 없었다”며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간부공무원도 “장관 사퇴 이후 열린 긴급간부회의 때도 참석한 간부들 모두 장관의 사전인지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신뢰는 이 전 장관이 소방청장에게 ‘일부 언론사 단전·단수를 지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 전 장관을 비상계엄의 적극 가담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 장관이 국회에서 증언을 거부하는 모습과 헌재에서 내놓은 해명을 보면서 이때부터 ‘화려한 법기술자’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 소방청에 단전·단수를 지시한 문건이 존재한다는 것은 많은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다만 이 지시가 어떤 경로로 말단 서울소방본부에까지 전달됐는지를 두고서는 교묘한 말장난이 이어졌다.
이 전 장관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문건을 보기는 했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 전 장관은 또 허석곤 소방청장에 단전·단수를 지시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뿐”이라고 했다.
허 청장도 비슷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이 전 장관으로부터 단전·단수 지시를 받았지만 우리 업무가 아니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해오다가 사태가 확산되자 “단전·단수 지시가 명확하지 않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허 청장은 이 전 장관과 마찬가지로 이를 지시한 사실도 부인하고 있다. 허 청장 또한 서울소방본부장에게 ‘단전·단수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는지 확인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일관하고 있다.
결국 이들의 해명을 종합하면 단전·단수 문건은 존재하지만 이를 최고 명령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현장 대응부서인 서울소방본부까지 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셈이다. 행안부 한 공무원은 “화려한 법기술이고 말장난”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또 다른 공무원은 “비상계엄이라는 중대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책임을 위에서 아래로 미루는 모습만 보이면 하급 직원들이 무엇을 믿고 일할 수 있겠느냐”며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일하려는 공무원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단전·단수 논란이 소방청의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방청장과 차장이 연일 국회 상임위원회와 내란 국조특위 등에 불려나가고 있고, 검·경 등 수사기관에서도 여러 차례 참고인 조사를 받은 탓에 업무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소방청 한 관계자는 “연말연초 각종 사건·사고로 경계태세를 강화해야 할 때인데 청·차장이 연일 국회와 수사기관에 불려나가고 급기야 집무실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상황이 벌어져 곤혹스럽다”고 우려했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