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미국, 불편한 중국 : 아세안의 탈출구는?
고율의 트럼프 상호관세, '균형외교 전략' 아세안에 구조적 충격 … 다자주의 회복 위한 연대 모색 필요

전통적으로 아세안 각국은 ‘미·중 균형 외교’ 전략을 취해왔다. 그러나 트럼프의 상호관세 조치는 아세안의 외교 전략을 구조적으로 흔들고 있다. 베트남은 46%, 라오스는 47%, 캄보디아는 49%라는 고율의 관세율을 부과 받았고, 인도네시아(32%)와 말레이시아(24%), 필리핀(17%)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트럼프의 상호 관세 부과는 단순한 무역 마찰이 아니라, 아세안의 경제 기조와 지정학적 균형 모두에 영향을 주는 구조적 충격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상호 관세는 아세안에 위협이 된다.
첫째,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를 통해 제조업을 육성하고 산업화를 촉진하려는 아세안 개발 모델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인한 ‘중국+1’ 전략에 따라 다수의 서구 및 중국 기업이 아세안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아세안 각국은 중국과의 공급망 연계를 기반으로 제조업을 육성하고, 생산된 제품을 미국 EU 등 고소득 국가에 수출하는 ‘수출 주도형’ 성장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세안의 자국 산업이 저가의 중국산 제품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미국시장 대신에 아세안시장으로 저가의 중국산 제품이 다량 유입될 경우, 아세안 국가는 자국 산업을 보호할 만한 충분한 재정적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아세안의 주요 수출 시장이기 때문에 아세안 국가 대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4월 9일 트럼프는 대부분 국가에 대해 90일간 관세를 10%로 일괄 유예하기로 했고, 오직 중국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추가적인 고율의 관세를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 주식 시장은 반등했지만, 아세안은 미국이 불러온 정책 불확실성으로 인해 대중국 전략과 경제성장 전략을 새롭게 구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미국과 개별 협상은 위험성 커
‘상호관세’라는 개념은 얼핏 공정한 거래를 위한 조치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 적용 방식은 매우 자의적이다. 정책적 정합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정치적 효과와 대중적 메시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관세 부과의 근거로 제시된 비관세 장벽, 불공정한 시장 관행, 환율 조작 등은 객관적 수치화가 사실상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 관세율 산출 산식은 앞서 제시한 관세율 부과 근거를 제대로 반영했는지 의문이다. 한편 미국의 자국 내 비관세 장벽은 관세율 산정에서 배제하는 이중 잣대도 보여준다.
문제는 단지 높은 관세율이 아니라, 상호관세 조치의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불투명하고 예측 불가능한 관세 부과 방식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관세 발효 후 몇 시간 만에 상호관세 유예를 발표했다. 불과 수 시간 만에 입장을 번복함으로써 글로벌 투자자, 공급망 및 무역 관계자 모두는 미국의 무역정책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을 취해온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아세안 국가는 관세 구조가 일방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FDI의 자국 내 유치가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아세안 각국은 상호관세 사태에 대해 보복이 아닌 협상 전략을 취하고 있다. 베트남은 미국산 제품에 대한 전면 무관세를 제안하며, 자국에 부과된 46%의 관세의 45일 유예를 요청했고, 인도네시아와 태국 역시 고위급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해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자국의 미국산 수입품 관세를 5%로 낮추겠다는 제안을 담은 서한을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발송했고, 말레이시아의 안와르 총리는 아세안 차원의 공동 대응을 제안했다.
이처럼 아세안 각국은 트럼프의 상호관세를 단기적 위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미국과의 무역 조건을 재조정할 기회로 여긴 것으로 관찰된다.
하지만 각국이 개별협상에 나설 경우, 자칫 미국의 ‘맞춤형 거래(bespoke deal)’ 논리에 말려들거나, 국가 간 ‘양보 경쟁’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과의 비대칭적 관계를 심화시킬 수 있으며, 아세안 전체의 협상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 결국 이번 상황은 ‘지역 공동 대응’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국과 거리두기도 어려운 처지
미국의 관세 공세로 아세안은 경제적·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거리를 전략적으로 조정할 수밖에 없다. 미국시장 접근이 제한될수록, 아세안은 필연적으로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무역의 문제가 아니라 지정학적 재편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시진핑 주석은 4월 14일부터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순방했다. ‘운명공동체’라는 지역통합 담론을 내세우며, 아세안 지역의 경제·안보 패러다임을 중국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24년 10월에 타결된 ‘중-아세안 FTA 3.0’을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상품 및 투자뿐만 아니라, 디지털 경제, 친환경 경제, 공급망 상호 연결, 소비자 보호 등의 영역을 포괄하는 관련 규정과 통관 절차 등의 개정·신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중-아세안 FTA가 본격적으로 발효되면 아세안 시장과 산업이 중국에 더욱 긴밀하게 연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처럼 이미 중국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중국에 대한 정치적 제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수의 아세안 국가는 중국과의 전략적 거리 두기를 유지하고자 한다. 다만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상호관세 부과처럼 미국의 보호무역은 강화되고 있고, 유럽은 경기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아세안 제품의 대체 수출 시장으로서의 기능에 한계를 나타낸다.
일본과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자국 내 또는 특정 우방국, 예를 들어 미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집중하고 있다. 그로 인해 아세안 지역은 한국과 일본의 생산기지 또는 부품 조달처로서의 전략적 중요성이 낮아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 결과 아세안 국가들은 더 이상 ‘미국 아니면 유럽’, ‘유럽 아니면 일본’ 등 전통적인 수출 다변화 경로를 활용하기 어려워졌다. 정치·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싶지만, 세계 최대 제조·소비 국가이자 자금과 공급망을 제공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불편한 파트너’와 어쩔 수 없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몰리고 있다.
경제통합으로 내부 협상력 높일 필요
트럼프의 상호관세 조치는 세계 무역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파괴적 조치이다. 특히 아세안 국가에는 단순한 무역 분쟁이 아니라 개발 모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트럼프의 관세는 아세안에 ‘협상’을 강요한다. 아세안 각국은 자신만의 생존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개별 대응의 한계는 명확하다. 아세안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외교적 대응이 아닌, 구조적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아세안은 2025년 새롭게 출범할 아세안경제공동체(AEC)를 바탕으로 실질적 블록으로 거듭나야 한다.
단일 통화까지는 어렵더라도 기술규정·품질기준·인증 시스템 등의 조화, 노동법·환경기준·외국인 투자 규정 등 규제의 조화(regulatory harmonization), 범 아세안 전자지갑·디지털 화폐 간 호환 등 디지털 결제 연계 등의 제도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원산지 규정을 강화함으로써 아세안 제품의 신뢰성과 독립성을 제고하고 중국의 우회 수출 기지라는 오명을 떨쳐 내야 한다.
아세안 지역이 중국과의 ‘불편한 근접성’에서 벗어나 전략적 주도권을 되찾는 길은 경제통합을 통해 내부적 협상력을 높임으로써, 아세안 스스로가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외적 협상력 제고를 위해 다자주의에 기초한 전략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한국 일본 호주 캐나다 등과 고부가가치 공급망을 개발하고, 아세안 역내 공급망을 재정비한다면 아세안 지역은 중간재 생산 거점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상호관세에 대응해 아세안과 같은 대내외적인 협상력 배양이 요구된다.
내부적인 협상력의 제고를 위해 첨단 기술력과 현지화율을 더욱 높이고, 국내 이해관계자 간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대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시장 다각화와 국제협력 강화, 기존 FAT의 활용률 향상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