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매물 나와도 매수자 없어…부실 커지고 M&A 실종
업계 1위 SBI만 매각 … 페퍼·상상인 실사, 매각은 불투명
성장 모형 제시 못해 … PF부실, 영업구역 규제도 걸림돌
부동산PF 사태로 저축은행들의 부실이 커지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저축은행들이 매물로 나오고 있지만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SBI저축은행을 교보생명이 인수하기로 결정하면서 내실 있는 경영을 해온 업계 1위 저축은행만 매각에 성공했다. 페퍼저축은행과 상상인저축은행 인수를 추진 중인 OK금융그룹만 금융권에서 유일한 매수 주체다.
30일 금융당국과 저축은행업계에 따르면 OK금융그룹은 페퍼저축은행 인수를 위한 실사를 진행 중이다. 실사가 끝나면 인수가격을 제시할 예정이다. 페퍼저축은행은 금융당국의 경영실태평가 결과 적기시정조치 심사 대상에 올랐지만 올해 300억원의 유상증자를 거치면서 유예 조치를 받았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해 말 기준 부실채권(NPL)비율은 14.18%, 연체율은 9.82%로 자산규모 10위 이내 저축은행 중 부실이 큰 편이다. 최근 2년간 적자가 2000억원을 넘어서면서 대주주인 사모펀드(PEF)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OK금융그룹, 금융권 유일 매수 추진 = OK금융그룹이 페퍼저축은행 인수에 나선 이유는 현재 주요 계열사인 OK저축은행의 영업권이 서울·충청·전라 3권역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매출 확대를 위해서는 경기·인천으로 영업지역을 확대해야 하는데, 페퍼저축은행의 영업권이 경기·인천 지역이다.
OK금융그룹이 상상인저축은행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기·인천 영업권을 가진 상상인저축은행 인수를 통한 영업권 확대가 목적이다. OK금융그룹 내부에서도 “필요한 건 영업권이지 어떤 저축은행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다만 이미 지난해말 실사를 끝낸 상상인저축은행 인수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가격 협상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다.
OK금융그룹은 실사결과를 토대로 인수 가격을 제시했지만, 상상인측에서는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하고 있다. 상상인저축은행이 보유한 자산의 부실 여부를 놓고 양측의 입장이 갈렸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는 2023년 상상인저축은행, 상상인플러스저축은행 대주주에 대해 계열사 보유 지분을 10% 이내로 줄이라는 매각 명령을 내렸다. 상상인그룹은 지분 매각 명령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동시에 저축은행 매각에 나섰다. 상상인저축은행은 지난달 금융당국으로부터 적기시정조치인 경영개선권고를 부과받기도 했다.
OK금융그룹은 실사를 통해 결정된 인수 가격에 페퍼저축은행과 상상인저축은행이 응한다면 두 곳 모두 인수할 의향이 있다는 입장이다. 가격을 더 높여서 인수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이다. 따라서 가격 협상 여부에 따라 두 곳 모두 매각되거나 둘 다 매각이 안될 수 있다. 저축은행 업계 일각에서는 M&A 성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관측이 나오고 있다.
◆M&A 규제 완화했지만 반응 '썰렁' = 지난해 12월 적기시정조치를 받은 라온저축은행은 코스닥 상장사인 베셀에 매각을 추진 중이다. 베셀은 이달 10일 정정공시를 통해 라온저축은행에 대한 취득 지분이 48만주(지분율 60%)에서 32만주(지분율 40%)로 줄었다고 밝혔다.
내달 31일까지 금융위원회에 주식양수도 승인신청서를 접수하고 6월 30일까지 대주주 적격성 심사 승인을 완료할 계획이다. 금융당국과 업계 일각에서는 베셀이 최대주주가 아니라 제3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라온과 함께 적기시정조치를 받은 안국저축은행은 아직까지 인수자 또는 매각협상이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티메프(티몬, 위메프)를 사겠다는 인수자들도 있는데, 금융권에서 저축은행 인수자는 OK금융그룹이 유일하다”며 “이 같은 상황이 저축은행 업계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저축은행 구조조정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저축은행 인수·합병(M&A)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지만 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이후 무분별한 대형화를 막기 위해 동일 대주주의 영업구역이 확대되는 3개 이상 저축은행 소유·지배는 제한돼 있고, 금융당국은 영업구역이 확대되는 저축은행간 합병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예외적으로 부실저축은행 등에 대한 인수는 허용했는데 예외 범위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완화하기로 한 것이다.
◆지방 소재 저축은행 어려움 가속화 = 하지만 업계에서는 영업구역 규제 완화를 요구하고 있다. 상호저축은행법은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눠 저축은행의 영업구역을 제한하고 있다.
서울과 경기·인천 등 수도권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 저축은행들의 실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지방 소재 저축은행들의 어려움은 더욱 가속화될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영업구역 제한으로 인해 앞으로 지방 저축은행을 인수할 곳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며 “영업구역을 완화하지 않은 채 M&A 활성화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일부 사모펀드들이 저축은행 인수를 타진하는 경우가 있지만 현행 규제 환경에서는 성장 모형을 제시하기가 어려울 실정”이라며 “향후 먹거리를 찾는 게 큰 과제”라고 말했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저축은행의 영업구역 규제 완화가 쉽지 않은 사안이다. 영업구역 제한은 지역 기반 서민금융기관 역할을 맡은 저축은행의 출범 취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영업구역 제한을 풀면 저축은행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SBI저축은행 인수는 우량한 저축은행을 얻게 되는 교보생명과 투자금 회수를 위한 일본 SBI그룹의 이해관계가 들어맞은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라며 “부동산PF 사태와 경기침체 등으로 향후 부실 저축은행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데 M&A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