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기업 지배자, 중국정부와 블랙록

2025-05-19 13:00:02 게재

인프라 투자, 상호 출자 등 미·중 ‘자본전쟁’ … 영향력 10위권에 중국 6개, 미국 2개

닛케이비즈니스 지배력 지수

전세계 수많은 기업을 지배하는 자는 누구일까.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최근호는 기업의 매출과 그 기업에 대한 출자 및 지분구조 데이터를 기초로 독자적인 지수(NPF·Network Power Flow)를 만들어 지배력 순위를 내놔 주목을 끌었다.

NPF지수를 통화가치로 환산해 순위를 매긴 결과, 중국은 정부가 미국은 금융자본이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은 정부와 국영기업 중심으로 10위권에 6개, 미국은 자산운용사 2개가 이름을 올렸다. 닛케이비즈니스는 “2억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미·중간 ‘자본전쟁’ 실상과 실질적 지배자가 누구인지 드러났다”고 했다.

전세계 인프라 장악한 중국정부

중국정부는 29조5231억달러의 NPF 가치를 가진 것으로 추산돼 압도적 1위를 보였다. 중국 국무원 산하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도 11조3779억달러의 가치로 2위에 올랐다. 이어서 미국 자산운용업체인 블랙록(4조2287억달러)과 뱅가드그룹(3조4877억달러)이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상위 10개 가운데 중국 최대 석유회사인 시노펙(6위)과 페트로차이나(8위) 등이 포함됐다. 일본마스터트러스트신탁은행(5위)과 노르웨이 국부펀드를 보유한 노르웨이정부(10위)가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로 10위권에 들었다. 한국은 △삼성전자(51위) △정부(72위) △국민연금공단(150위) 등이 200위 안에 포함됐다.

중국정부가 압도적인 가치를 보인 데는 전세계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주 북부에 있는 다윈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다윈항은 중국 기업인 랜드브릿지가 2015년 약 5억호주달러(약 4500억원)로 99년간 장기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이 일정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업 가운데 12.6%가 호주에 있다. 전세계 국가 중 최고 비중이다.

파나마운하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중간 패권경쟁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현재 파나마운하 주변의 2개 항만에 대한 운영권을 갖고 있는 곳은 홍콩 기업 CK허치슨홀딩스다. 트럼프의 압력으로 항만 운영권을 블랙록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매각하려 했다가 중단될 정도로 중국정부의 영향력이 크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11월 APEC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페루를 방문해 가장 먼저 찾은 창카이항도 사실상 중국정부가 지배권을 갖고 있다. 중국은 이곳에 36억달러(약 5조원)를 투자했다.

중국정부나 국영기업은 동남아에서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각종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다. 35억달러(약 5조7000억원) 규모의 차관을 제공해 2021년 완공한 라오스 고속철도가 대표적이다. 현재 이 노선은 태국까지 연결하는 연장선을 건설중으로 이르면 2030년 완공된다. 이밖에 620억달러(약 87조원)가 투입돼 2030년 건설을 목표로 하는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PEC)’은 안보와 경제면에서 지역내 지정학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중국은 2013년부터 10여년 동안 ‘일대일로’ 사업에 약 1조달러(약 1400조원)를 투입해 전세계 인프라를 장악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번 닛케이비즈니스의 NPF 지수에 따르면 중국이 일정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업이 많은 곳을 국가별로 살펴보면, 호주에 이어 싱가포르 영국 독일 한국 브라질 미국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반도체와 전자부품 등을 중심으로 대만(18%)과 미국(9%) 기업에 대한 지배력도 상당한 것으로 추산됐다.

막후 지배자 미국 자산운용회사

미국의 경우 글로벌 자산운용 업체가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한다. 대표적으로 블랙록(3위)과 뱅가드그룹(4위)이다. 닛케이비즈니스는 “애플이나 아마존 등의 영향력이 강할 것으로 예상하겠지만 기관투자자가 상위에 있는 것은 NPF지수의 성격 때문”이라며 “지분소유 관계의 네트워크에 따라 소유한 기업의 매출과 주식비중에 가중치를 둬 지배력을 산출했다”고 했다.

실제로 이들 기관투자자는 연간 2조달러 이상의 매출을 거두는 미국 거대 7개 테크기업(매그니피센트 세븐) 주식을 각각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미국 3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뱅가드그룹,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운용하는 자산 규모는 약 26조달러(약 3경6000조원)에 이른다. 미국 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에 버금가는 규모다. 블랙록 단일 회사만 11조달러(약 1경5400조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면서 수많은 기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울러 이들 빅3는 상호 주식보유를 하고 있는데, 뱅가드와 스테이트 스트리트는 블랙록 지분을 각각 9%, 5% 가량 갖고 있다.

블랙록이 개별 자산운용사로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는 데는 강력한 자산운용 플랫폼인 ‘알라딘’의 존재 때문이다. 알라딘은 블랙록이 1988년 개발한 것으로 갈수록 사업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플랫폼을 통해 자산운용 업무를 대행하고, 포트폴리오 구성 등 리스크가 높은 업무를 자동화했다. 블랙록은 마이크로소프트와 AT&T 등 전세계 기업을 대상으로 알라딘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주식 보유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보다 많은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NPF지수에 포함되지 않는 또 다른 실질적 파워에 해당한다.

미즈노 다카유키 일본국립정보학 연구소 교수는 “중국은 정부에 권한이 집중됐지만, 미국은 자산운용사들 상호간 출자 등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라며 “중국보다 강한 것은 미국”이라고 했다. 미즈노 교수는 “미국 방식은 어떤 한 기업이 망해도 동시에 쓰러지는 구조가 아니다”라며 “하지만 중국은 정부의 정책 실패가 모든 것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본 권력이 극히 일부 기업에 집중되는 데 따른 우려도 있다. 닛케이비즈니스는 “미국 빅3 자산운용사가 시장에서 경합하고 있는 기업들에 대해 공동으로 주주가 되는 경우가 많아 기업간 경쟁이 방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이들 빅3 자산운용사는 미국 대형 항공사에 모두 투자하고 있어 경쟁을 저하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항공사가 빅3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항공요금이 3~7% 높게 책정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존 코츠 하버드대 교수는 “(블랙록의 알라딘에 대해) AI의 등장 자체는 기업활동을 효율화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며 “다만 권력 집중이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워런 버핏 능가하는 중국 자산가

이번 조사에서는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NPF지수 산정방식에 기초해 NPI(Network Power Index)도 산출했다. 개인이 가진 주식의 의결권 등을 통해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를 지표화한 것이다. 얼마전 은퇴를 선언한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NPI지수를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4510억달러로 2위였다. 1위는 중국의 온라인 판매회사 징둥닷컴을 창업한 리우창동 전 최고경영자로 4874억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리우 대표는 물류와 기술혁신을 통해 중국에서 업계 최고의 기업을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방식으로 NPI지수를 화폐가치로 전환해 순위를 매긴 결과, 델테크놀로지 창업자인 마이클 델(4266억달러)과 중국 지리 창업자이자 회장인 리슈후 회장(3232억달러) 등이 뒤를 이었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215억달러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집계됐다. 일본에서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880억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어 가장 지배력이 강하다는 분석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NPF(Network Power Flow): 닛케이비즈니스가 와세다대학, 일본 국립정보학연구소와 협력해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기업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Orbis’의 약 8억6000만건 가운데 2023년 기준 주주 정보가 기재된 약 2억건의 기업 데이터를 추출해 분석했다. 기업에 대한 보유지분 비중은 의사 결정권에서 영향력 등을 감안한 독자적 산출식에 가중치를 뒀다. 예컨대 '매출액×가중평균한 지분비율' 등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자회사나 손자회사 등 간접 출자를 포함한 지분관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분류하고, 지분율 등을 감안해 산출했다. 따라서 이번 분석결과는 전세계 기업에 누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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