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첫 1조달러 유니콘 배출할까
벤처캐피털, 상장 미루며 천문학적 가치 상승 노려
2년 전 인공지능(AI) 칩 제조사 엔비디아가 처음으로 ‘1조달러 기업 클럽’에 가입했을 때, 많은 투자자들은 주가가 과대평가되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당시 엔비디아 주식을 사들였던 사람들은 이후 4배 넘는 수익을 거뒀다. 이달 9일(현지시각) 엔비디아는 사상 최초로 시가총액 4조달러에 도달한 기업이 됐다.
공개시장에 상장된 기술 스타트업들이 최근 수년간 보여준 높은 수익률은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 투자자들에게 큰 부러움의 대상이다. 엔비디아뿐 아니다. 클라우드 컴퓨팅 업체 코어위브 기업가치는 올해 3월 상장 이후 300% 넘게 상승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현금이 넘쳐나고 AI 열풍이 거세지자, 많은 VC들은 유망 스타트업을 비상장 상태로 오래 보유하면서 천문학적인 기업가치 상승을 노리고 있다”며 “실리콘밸리에 첫 비상장 1조달러 유니콘이 탄생하는 것은 이제 ‘언제냐’의 문제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은 VC업계의 운영방식까지 바꿔놓는 한편 본래부터 변동성 큰 이 업종의 리스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팬데믹 이후 침체했지만 AI 덕에 부활 = 2023년까지만 해도 VC업계는 침체에 빠져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투자열풍 속에 2021년 미국에서 10억달러 이상 가치의 비상장 유니콘이 344개나 생겨났지만 불과 2년 뒤인 2023년엔 단 45개에 그쳤다. 금리상승으로 업계는 비틀거렸고 고공비행하던 밸류에이션은 허상처럼 보였다. 이른바 ‘좀비 유니콘’이 속출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실리콘밸리는 다시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올 상반기 미국 VC업계가 투자한 자금의 약 3분의 2가 AI 기업들에 쏟아졌다. 이제 유니콘은 ‘데카콘(100억달러 이상)’ ‘헥토콘(1000억달러 이상)’으로 진화중이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는 최근 3000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투자사 코튜(Coatue)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50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비상장 기업의 총합이 1조3000억달러를 넘는다고 분석했다. 이는 2년 전보다 두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같은 고평가는 풍부한 자본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미국 VC업계가 운용중인 자산규모는 지난해 기준 1조3000억달러에 달했다. 2015년 대비 3배가 넘는다. 팬데믹 시기 자금이 여전히 남아 AI 기업들에 유입되고 있는 데다 중동 국부펀드처럼 새로운 해외자금도 밀려들고 있다. 연기금이나 대학기금 등 기존 일부 투자자들이 물러난 자리를 이들이 메우고 있다.
또한 VC들은 자금의 대부분을 초기단계 스타트업이 아니라 성숙단계의 기업에 쏟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체 VC 투자금 중 78%가 성장단계 기업에 집중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59%에서 크게 상승했다. 올해 말까지 오픈AI에 3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소프트뱅크가 대표적 사례다. 이는 역대 IPO 조달금액 중 최고액이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스타트업들이 상장을 미루는 이유는 창업자들이 상장 후 뒤따르는 복잡한 규제와 회계 공개를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VC들이 창업자에게 빠른 상장을 압박했지만 이제는 VC 스스로도 기업을 오래 보유하며 가치상승의 열매를 더 많이 거두려 한다는 것.
관건은 유동성이다. 전통적인 VC펀드는 보통 수년짜리 폐쇄형 구조로, 일정시점에 투자자에게 수익을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등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장 회피와 장기 보유의 대가 = 대표적인 것이 ‘세컨더리 텐더 오퍼(secondary tender offer)’다. 이는 초기 투자자나 직원이 IPO 전 또는 또 다른 펀딩라운드 전 지분 일부를 매각해 현금화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다. 피치북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이 방식으로 600억달러어치의 거래가 발생했다.
지난해 4분기엔 500억달러였다. 하지만 IPO에 따른 엑시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엔비디아 주식은 하루 평균 260억달러 규모가 거래됐다.
또 다른 방법은 ‘영구자본(permanent capital)’이다. 대표적 VC인 세쿼이아캐피털은 2021년 기존 10년펀드 구조를 구시대적이라며 폐기하고 투자기한 없이 상장·비상장 기업에 통합투자하는 ‘세쿼이어캐피털펀드’로 대체했다. 라이트스피드(Lightspeed) 같은 다른 VC들도 최근 기존 포트폴리오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새 자금을 유치하는 구조를 가진 ‘컨티뉴에이션펀드’를 도입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VC 산업은 ‘공룡화’되고 있다. 앤드리슨 호로위츠와 세쿼이아, 제너럴 캐털리스트, 라이트스피드 같은 대형 VC들은 현재 수십억달러 펀드를 여럿 운용하며 많은 투자자들을 유치하고 있다.
반면 조쉬 쿠슈너가 이끄는 ‘쓰라이브 캐피털(Thrive Capital)’과 닐 메타가 설립한 ‘그리녹스(Greenoaks)’는 소수 스타트업에 집중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들은 소규모 팀으로 움직이며 대형 VC 못지않은 금액을 투자한다.
쓰라이브는 오픈AI에 10억달러 넘게 투자했다. 투자 포트폴리오 내에서 향후 1조달러급 스타트업이 여럿 나올 수 있다고 자신한다. 쓰라이브는 또 사모펀드처럼 기업인수 뒤 AI 기술을 접합해 시너지를 내는 방식도 실험중이다.
이처럼 VC업계는 구조와 전략, 정체성까지도 재편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같은 행보가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한 기업에 거액을 투자하고 오랜 기간 보유하는 전략은 실패할 경우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현재 고공비행하는 밸류에이션을 가진 AI 스타트업들이 언젠가 또 다른 ‘좀비 유니콘’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1조달러라는 유혹 앞에 투자자들의 지갑은 좀처럼 닫힐 줄 모른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