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벼랑 끝 전술에 굴복한 EU
15% 관세 수용하고 철강·알미늄 고율관세 못낮춰 ··· 회원국 이견에 협상력 상실
협정에 따르면 미국은 자동차·반도체 등 주요 품목에 15% 관세를 부과하고, EU는 향후 3년간 750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며 60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번 협상은 EU가 처음부터 협상 주도권을 놓친 채 트럼프 행정부의 ‘벼랑 끝 전술’에 끌려다닌 사례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0% 관세를 예고한 뒤 협상 지연을 이유로 50%까지 상향하겠다고 위협했다. 이후 다시 30%로 낮추는 등 관세율을 조정하며 EU를 압박했고, EU는 적절한 대응책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패턴이 반복됐다.
무엇보다 EU는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경제 블록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캐나다처럼 보복 관세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지 못했다. 이는 회원국 간 이해관계 충돌과 미국 자극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겹친 결과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는 다른 나라보다 강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내부 이견으로 인해 수차례 계획을 수정하며 자초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EU는 협상 초기 보복 조치를 가장 먼저 언급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독일, 네덜란드 등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무역 갈등 확산을 우려했고, 프랑스와 남유럽 국가들은 정치적 고려로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이 같은 내부 분열은 EU의 일관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고, 미국에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품목별로는 일부 성과를 얻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쉽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EU 자동차 산업의 경우 미국 내 관세율이 기존 27.5%에서 15%로 인하돼 일정한 혜택을 얻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무역 갈등 격화는 피했고, 우리의 근본적 이익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네덜란드의 딕 스호프 총리도 “EU와 미국 간 합의는 우리 같은 개방 경제에 필수적”이라며 “세부 사항을 신속히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벨기에의 바르트 더 베버르 총리는 “이번 합의는 안도할 일이지 축하할 사안은 아니다”라며 “일부 부문에서 관세가 오를 것이며, 핵심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EU 내부에서도 국가별 이해관계에 따라 합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반도체와 의약품의 15% 관세 적용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약품은 이번 합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 반면, EU는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반도체에 별도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도 제기돼 향후 갈등이 재점화될 수도 있다.
이번 합의에서 EU는 그간 유지해온 무역 균형에 대한 입장을 사실상 철회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미국은 어떤 양보를 했는가’라는 질문에 “출발점은 불균형이었다. 우리 측의 대미 흑자와 미국 측의 적자”라며 “무역관계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고 답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주장해온 논리와 일치하며, 협상 전까지 EU가 강조해온 입장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EU는 그동안 미국이 상품 부문에서는 적자를 보고 있지만 서비스 부문에서는 흑자를 기록하고 있어, 양측 무역이 상호 보완적이며 불균형하지 않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EU는 미국과의 무역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했지만, 명확한 전략 부재와 내부 분열로 인한 한계를 드러낸 협상이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