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관세타결 후 각자도생 모색
비용절감 가격인상 등 대책 마련 분주 … 문서 없는 5500억달러 투자 놓고 후폭풍
“트럼프행정부의 광범위한 관세조치가 외수부문에서 일본경제를 직·간접적으로 짓누르는 커다란 위험이다.”(2025년 일본정부 경제백서) “관세 15%는 커다란 비용의 증가다. 개별 기업의 노력에 한계가 있다.”(다나카 도시조 캐논 부사장)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미국과 관세협상을 타결한 일본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정부와 기업은 거시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기업 실적악화에 대한 타개책 모색에 나서고 있다. 관세협상 후폭풍은 이시바정권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양상이다.
도요타, 중국산 부품으로 눈돌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3일 “도요타가 태국에서 중국산 부품을 조달하기로 했다”면서 “일본 기업의 공급망 전반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2028년부터 태국에서 생산하는 전기자동차(EV) 부품으로 시작하지만 비용절감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풀이했다. 신문은 “미국발 관세로 인한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태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역에서 조달 비용의 효율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요타의 이러한 대응은 미국이 지난 4월부터 자동차에 대한 품목관세를 25% 부과하면서 실적이 급락한 데서도 확인된다. 도요타는 올해 4~5월 두달간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800억엔(약 1.7조원) 감소한 것으로 추산했다.
골드만삭스증권은 이번 합의로 도요타의 이익감소폭이 1조6000억엔(약 15조원)에서 8720억엔(약 8.2조원)으로, 혼다의 경우 5600억엔(약 5.3조원)에서 3052억엔(약 2.9조원)으로 줄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 완성차업체 7곳 전체의 이익 감소는 25% 관세일 경우 3조4700억엔(약 32.6조원)으로 예상됐지만 15%로 내려가면서 1조8900억엔(약 17.8조원)으로 낮춰 잡았다.
비용절감과 함께 가격인상도 뒤따르고 있다. 하치무라 다케시 이토추상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1일 기자회견에서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서 과일 가공품을 미국으로 수출하는데 관세의 영향이 일부 나온다”며 “7월 이후 가격을 인상했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이날 발표한 2분기 결산실적에서 관세 영향으로 관련 사업부문에서만 이익이 10억엔(약 94억원) 가량 감소했다.
다나카 도시조 캐논 부사장은 지난달 24일 회견에서 “관세가 15%라도 큰 비용 증가를 가져온다”며 “개별 기업의 대처에 한계가 있다”고 했다. 캐논은 일본과 베트남 등지에서 미국에 수출하고 있지만 관세에 따른 비용 증가는 올해 최대 160억엔(약 1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에 복합기 등을 수출하는 코니카미놀타는 6월 말 이후 관세만큼을 가격에 전가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낮은 관세율 국가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등 모든 방안을 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건설기계를 제작하는 고마츠도 관세에 따라 올해 이익이 750억엔(약 7000억원) 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8월부터 가격을 인상하기로 했다. 아사히신문은 2일 “15% 관세로 수출 기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며 “향후 미국 내에서 판매가격에 전가하는 움직임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자동차 관세율 낮추는 데 총력
미일 관세협상이 마무리되면서 일본 내에서 뒷얘기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본정부는 이번 관세협상에서 모든 노력을 자동차 관세율을 낮추는 데 집중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도요타 아키라 도요타 회장은 지난 5월 도쿄 한 호텔에서 단독으로 45분간 면담했다. 일본측 협상 대표를 맡은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정장관이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다음날이다. 이 자리에서 도요타 회장은 “자동차산업은 일본내 550만명의 일자리를 만드는 기간산업”이라며 “수출이 줄면 에너지를 구입할 외화는 어떻게 확보하느냐”고 말했다.
도요타 회장은 그러면서 협상카드의 하나로 미국차 수입확대 또는 미국 현지에서 만든 일본차의 역수입 등을 제안했다. 도요타 회장은 “미국 완성차를 일본내 도요타 판매점에서 팔수도 있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도요타는 한편으로 지난해 여름부터 미국 워싱턴에 별도의 팀을 구성해 현지 정보수집을 강화하는 등 정부 협상을 측면 지원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시바 총리와 도요타 회장의 사적인 인연도 작용했다. 두 사람은 게이오대 부속고등학교와 게이오대 법학부 동기생이다. 오랜 기간 자민당내 비주류였던 이시바 총리와 도요타의 관계는 소원했지만 총리 취임 이후 지난해 10월 만남부터 관계가 진전됐다는 후문이다. 도요타 관계자는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이시바 총리와 교류는 거의 없었다”면서도 “(두 사람 만남 이후) 도요타로서는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달 31일 완성차 및 부품업체 사장단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업계 관계자들은 관세에 따른 부담과 우려 등을 거론하며 국내 수요를 촉진할 수 있는 정부 대책을 요청했다.
자동차 대미 관세는 현 이시바정권의 운명과도 직결됐던 사안이라는 평가다. 이시바 내각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임금인상 기조가 자동차산업 실적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도요타 실적이 악화하면 연관 산업 종사자에 영향을 미쳐 경제의 악순환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은 지난해 미국에 자동차 137만대를 수출했다. 금액으로는 약 6조엔(약 56.4조원)에 이른다. 자동차 부품까지 합치면 7조2000억엔(약 67.7조원) 규모다. 대미 수출액(21조엔)의 1/3을 넘는 규모다. 이에 비해 미국 자동차는 지난해 일본에서 1만6074대(1529억엔) 팔렸다.
미국은 그동안 일본의 수입차 안전인증 기준이 비관세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반발해왔다. 미국은 1995년 클린턴행정부 때 일본차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한 적도 있다. 일본은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차에 대한 무관세, 수입절차 간소화 등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합의 문서 없는 것은 양측 이해 맞았나
“일본은 나의 주도 아래 미국에 5500억달러를 투자하고, 미국은 이익의 90%를 갖는다.” 미일 관세협상 타결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한마디에 일본 정치권과 금융시장에서는 논란이 거세다. 특히 이번 합의와 관련한 공식문서가 없다는 점이 다양한 억측과 불신을 불러오고 있다.
특히 일본은 최근 6년간 대미 직접투자 국가 1위를 유지하는 등 최대 투자국가라는 점에서 불만이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까지 일본의 대미 직접투자 잔액은 8192억달러로 이번에 합의한 5500억달러를 크게 웃돈다”면서 “일본 국책금융기관이 미국이 주도하는 투자를 지원하는 것은 정부투자 금융기관의 설립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정부측 협상대표인 아카자와 경제재정담당 장관은 “일본의 직접 출자는 1~2% 정도에 그친다”며 “현금을 퍼주고 미국이 90%를 가져간다는 주장은, 일본이 노예국가처럼 비치는 것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추후 합의사항을 문서로 정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합의문서가 없는 것에 대한 여러 해석도 나온다. 경제부처 한 간부는 민영방송 TBS와 인터뷰에서 "트럼프정권이 끝난 이후 (대미 투자 등을) 유야무야할 수도 있다"고 말해 굳이 명문화된 문서로 족쇄를 채울 필요가 없다고 암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번 합의내용 가운데 보잉사 비행기 100대 구매와 알래스카 LNG 구매 등은 이미 JAL과 ANA등 일본 항공사와 미쓰비시상사 등이 구매하기로 했거나 검토하던 사안도 있어 추가적 부담이 아닐 수 있다는 평가가 있다.
구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트럼프의 애초 목적은 일본이 5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하는 것"이라며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의 비위를 맞춰 향후 이행이 불투명하거나 이미 하고 있던 사업으로 선물보따리를 안기고 관세율 인하를 얻었다는 다소 긍정적 해석인 셈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논쟁이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이시바가 중도에 퇴진할 경우 차기 자민당 총재로 거론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장관은 “투자와 관련된 합의문서가 없으면 양국간 커다란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며 견제구를 날렸다. 입헌민주당 등 야당은 4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 예산위원회 등에서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 등에 대해 강하게 추궁할 태세다.
한편 이시바 총리는 지난달 참의원 선거 참패로 퇴진 위기에 몰린 가운데 사퇴 거부 명분으로 미일 관세협상 후속조치를 들고 있다. 그는 지난 1일 “미일 쌍방이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해 나가야 한다”며 “오늘의 합의로 인해 수출품목에 대한 영향이 최소화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다. 당 안팎의 사퇴 요구를 일축한 셈이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