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기업 경쟁력’이 중국과 러시아를 갈랐다

2025-09-09 13:00:05 게재

가족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전 세계적인 인기몰이는 ‘한류’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언어 음식 거리풍경 의상 풍속 등 한국적인 여러가지를 영상 속에 담아내며 세계 곳곳에서 ‘따라 하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지만, 한국에서 만든 작품이 아니다. 헐리웃 제작사가 만들어 넷플릭스에 공급한 미국 영화다.

미국인들이 ‘K-컬처’의 힘을 믿고 제작·유통 일체를 맡아 전세계에 공급한 게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다. 세계인들 사이에 한류와 한국문화의 인기가 한국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세계적으로 이미 보편화돼 있음을 일깨워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쯤에서 이렇게까지 고속성장한 ‘K-신드롬’의 출발점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시작한 건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K-신드롬’의 출발점은 ‘K-팝’이고, 그 산실은 ‘연예기획사’로 불리는 전문기업들이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한국의 문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돌파구를 연 게 기업이라는 사실 말이다. K-팝이 전세계를 휩쓸게 된 데는 전문성과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기업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유망 신인 발굴과 육성, 콘텐츠 제작 및 공연, 국내외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전략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고 시장을 개척해나간 기업들 덕분에 글로벌 무대에서 ‘한류’라는 신세계가 열렸다.

‘K팝’의 출발점, 연예기획사 전문기업들

SM엔터테인먼트를 필두로 JYP, YG, 뒤이어 등장한 하이브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그 지평을 넓혀나갔다. ‘K-팝 스타’의 꿈을 안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훈련생들을 강도 높게 훈련시키는 이들 기업의 연습장은 외국인관광객들의 ‘한류성지 순례’ 코스로도 한몫을 했다. 오아시스 서라벌 등 가수 발굴과 레코드 취입 정도에 그쳤던 ‘음반회사’ 시절엔 꿈도 못 꾼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반도체(삼성, SK하이닉스)와 자동차(현대·기아), 가전(삼성, LG), 조선(HD현대, 삼성, 한화), 철강(포스코, 현대제철) 등 제조업뿐 아니라 문화산업에서도 국제수준 규모와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의 등장이 ‘K-파워’를 드높이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기업”이라는 존 미클스웨이트 블룸버그 편집장의 말처럼 기업들은 체계적인 상품개발과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통해 다른 어떤 조직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국제 외교·통상무대의 높은 파고를 겪고는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부쩍 강조하고 있는데 기업이야말로 국력을 키우는 원천이다. 경쟁력 있는 기업의 존재 여부가 총체적인 국력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 간의 ‘국력 역전’이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미국(27조9700억달러)에 이어 중국(18조5600억달러)이 세계 2위를 달린 반면 러시아(1조9043억달러, 12위)는 중국의 10% 수준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GDP는 한 순위 아래인 한국(1조7848억달러, 13위)과 거의 차이가 없다. 그나마 2016년까지는 한국에도 못 미쳤다가 주요 생산품목인 원유와 금속·광물의 국제시세 상승 덕분에 GDP가 늘어난 게 이 정도다.

러시아는 압도적 크기의 땅덩어리를 거느리고 있고,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권의 맹주로 군림한 나라였다.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에 온갖 물자와 기술을 대주며 국가로서 걸음마를 할 수 있게 도와준 나라였다. 그랬던 나라가 경제규모에서 중국과 비교도 할 수 없게 뒤떨어졌고 반대로 중국이 러시아가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국력을 키운 요인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의 유무다.

중국은 세계적 통신장비 및 스마트폰업체인 화웨이를 비롯해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회사인 BYD와 글로벌 1위 드론업체인 DJI, 클라우드 및 온라인플랫폼기업인 알리바바 등에 이어 최근 인공지능(AI)분야에서 돌풍을 일으킨 딥시크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반면 러시아의 대표기업은 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과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 광물업체인 노릴스크니켈 등 원자재분야에 쏠려 있다. 특별한 기술을 보유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땅을 파먹는’ 기업이 대부분이다.

‘기업 개혁법안’이 가져올 후과 성찰 필요

두 나라 사례가 일깨워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가 제대로 국력을 갖추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국력 확충’을 화두로 던진 이재명정부의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각별히 새겨야 할 대목이다.

출범 초부터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고 있는 ‘기업 개혁법안’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기업들의 창의와 의욕을 꺾어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국력 퇴행의 자충수가 되지는 않을 것인지 엄정한 성찰이 필요하다.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