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31 연평도 평화언덕 둘레길

평화를 갈망하는 조기의 섬

2025-09-19 13:00:42 게재

지금은 연평도가 한반도의 화약고가 됐지만 연평도는 어업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섬이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고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고의 조기 어장이었다. 해마다 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면 연평바다는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다.

해마다 조기 철이면 두달 간 연평도에는 파시(波市)가 섰다. 파시는 ‘파도(물결) 위의 임시 시장’이었다. 처음 파도 위에서 열리던 시장이 점차 어장 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 갔고 그렇게 연평도, 위도, 흑산도 등에 파시가 열렸다. 파시가 서는 몇 달간 섬에는 한시적으로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등이 생겼다.

연평도에도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 했다. 주민 수백에 불과하던 연평도는 선원, 상인들 수만 명이 들어와 북적거리는 해상도시가 됐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에는 어선이 1000여척, 1936년에는 2000여척, 1943년에는 무려 5000여척의 배들이 몰려들었다. 1944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마리에 달했고,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명이었다.

그래서 파시 때는 ‘어업조합 출납고가 한국은행 출납고보다 많았다’고 했다. 요정이나 요릿집 같은 색주가만 100여집 이상이 생겼고 술을 따르는 작부도 500명이 넘었다.

해마다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했던 연평도 파시. 하지만 조기떼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해상도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연평바다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것은 1970년 무렵이다. 그렇게 연평도의 황금기도 끝나고 말았다.

해양경찰청은 가을 꽃게잡이철(9~11월)을 맞아 연평도 서해북방한계선 인근 중국어선의 불법조업 단속을 강화한다고 밝혔다. 사진 섬연구소 제공

이제 연평도는 해상의 군사 요충지다. 그래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 주민들은 누구보다 불안하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연평도를 기습 포격했고 무고한 생명이 살상당했다. 느닷없이 삶의 터전이 파괴된 그날 이후 연평도 주민들은 한동안 피란민이 되어 떠돌아야 했다. 주민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 연평도로 피란 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살아생전 다시 피란민이 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날의 포격으로 군인과 군부대 공사 인부 4명이 사망했지만 주민들의 인명사고는 없었다. 마침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동네에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객선 시간이 되면 연평도 주민들 대부분은 인천에서 들어오는 물건을 찾거나 손님을 마중하러 선창가로 나간다. 여객선이 목숨을 살렸다.

포격을 당한 집들 대부분은 철거됐으나 몇 채는 ‘안보교육’용으로 허물지 않고 ‘전시 중’이다. 벌써 15년의 시간이 흘렀으나 연평도는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긴장이 흐른다.

포격 사건 이후 연평도 사람들의 평화에 대한 열망은 더욱 절절하다. 그래서 연평도 섬길의 이름도 평화언덕 둘레길이다.

백섬백길 83코스인 평화언덕 둘레길은 연평항을 출발해 안보교육관, 망향전망대, 구리동해변, 가래칠기 해변, 평화공원을 지나 다시 연평항으로 돌아오는 14.9㎞의 트레일이다. 그대로 연평도를 한바퀴 도는 섬둘레길이다. 포격 사건 뒤 연평도 주민들은 한동안 같은 꿈을 꾸었었다고 한다. 전쟁이 나고 포가 떨어지고 도망가는 꿈…. 이제 연평도 주민들은 다른 욕심이 없다. 그저 남북이 평화롭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다.

백섬백길: https://100seom.com

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강제윤 사단법인 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