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케데헌’과 글로벌 한글

2025-09-25 13:00:14 게재

‘쓰’라는 글자가 너무 예쁘다. 마치 웃는 모습 이모티콘 같다. ‘꽃’은 글자 자체로 꽃 형상이다. 한글이 너무 재미있다.

일본에 한글 열풍이 일고 있다. 일상 언어에 한글을 섞어 사용하는 ‘한본어’가 유행하는 거다. 예컨대 “진짜 카와이이(예쁘다)” “아사카라(아침부터) 너무 먹었어요”하는 식이다. ‘얼짱’ ‘진짜’ ‘웃겨’ ‘배고파’ 등은 소셜미디어는 물론 공중파 TV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자연스럽게 말한다. ‘겨뿌겨뿌’는 삼겹살을 줄인 ‘겹겹’의 일본어 발음이다.

한글 간판과 광고도 늘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는 한글이 부각된 상품들이 쏟아진다. ‘볶음면’ ‘우유크림빵’은 한글 표기가 일본어보다 커 일본에서도 화제가 됐다. 일본의 젊은 세대에 한국 프리미엄이 확산하고 있는 거다. 노년세대의 한국 디스(경멸) 풍조와 정반대다.

K-컬쳐의 영향이겠다. 특히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히트를 치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약칭 ‘케데헌’으로 불리는데 시청횟수가 3억1420만회(9월 14일 기준)로 역대 1위이다. 2위인 오징어게임 시즌1의 2억6520만회를 훌쩍 넘었다. 삽입곡 ‘골든’과 ‘소다팝’ 등 4곡은 빌보드 차트 톱10에 들기도 했다.

극중 남성 아이돌이 부르는 ‘소다팝’이 인상적이다. 가사 중 “넌 절대 놓칠 수 없어”는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부른다. 영화에는 50개가 넘는 한글이 나타난다. 소품 상표 간판과 자막 형식이다. 우리랑 놀자, 어서 오세요, 대세 목욕탕, 매운맛 챌린지, 라면, 호프도 나온다.

글로벌 문자 한글, 더 고민할 지점 없나

자연히 한글에 대한 관심도 폭발적이다. “케이팝(K-Pop)을 제대로 부르려면 한글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한다. 자연히 한글 배우려는 열기도 뜨겁다. 한국어검정능력시험(TOPIK)에 전세계에서 24만명(2023년 기준)이 응시했다. 한국어 교육기관은 2024년 기준으로 85개국에 248개 지부가 운용되고 있다. K-컬쳐 붐을 타고 한글이 글로벌 문자로 각광받고 있는 거다.

여기서 고민해 볼 지점이 있다. 한글 24자가 아름답고 단순하며 조형적으로도 완벽하지만 과연 각국의 언어를 담아내기에 충분한가. 영어 P와 F, B와 V 발음은 모두 피읖과 비읍으로 통용하고 있다. “패션”이라고 하면 유행이란 뜻인지 열정인지 전후 문맥을 모르면 알 수 없다. 영어의 Z 발음도 지읒이나 시옷으로 쓴다.

2009년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할 문자로 한글을 채택했다는 뉴스가 화제를 모았다. 실제 바우바우시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이 한글로 찌아찌아어를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와 외교적 문제 등으로 보급사업은 중단됐다.

당시 찌아찌아족은 한글에 자모 하나를 추가했다. 바로 비읍 아래에 이응을 붙인 순경음 비읍이다. 텔레비전을 ‘뗄레ㅂ이시’로, 도로 간판의 지명 ‘LIWU’를 ‘을리ㅂ우’로 쓴 거다. 여기서 ‘ㅂ이’와 ‘ㅂ우’는 한글 키보드의 특성상 비읍과 이응이 위아래로 표시되지 않아 병렬로 표출한 것이다.

순경음 비읍은 15~17세기까지 활용됐으나 차차 반모음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셔ㅂ을’은 서울로 ‘더ㅂ어’는 더워로 변했다. 우리 언어에서는 사라졌지만 외국에서 부활한 셈이다. 비읍만으로는 V와 W를 표기하기 어려웠던 거다.

언어는 바뀐다. 시대와 함께 생노병사를 겪는다. ‘남ㄱ’와 ‘나모’를 거쳐 ‘나무’로 정착된 것처럼 말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지만 아래아 여린히읗 반치음 옛이응 네 자는 17세기 이후 쓰임이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어학회가 1933년10월 29일(당시 한글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사망선고를 내렸다. 권덕규 이희승 최현배 등이 당시 주역이다.

언어도 경제성 원리에 따라 간소화한다. 사회적 변화로 극존칭도 사라진다. 외국의 언어와 접촉하면서 표기방법이 변형되기도 한다. 1937년 ‘모던 조선 외래어사전’은 영어 다크호스를 ‘딸ㅋ 호스’로 했다. 다크(Dark)의 알(r)발음을 살렸다.

현재의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은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F도 P도 모두 피읍이다. B와 V도 비읍이고, J와 Z와 G가 모두 지읒이다. 받침도 복자음을 피한다.

지금 K-컬쳐가 세계와 교감하는 상황에 한글도 글로벌화에 부응할 수 없을까. 예컨대 비읍 아래나 옆에 이응을 붙여 영어 V에, 피읖에 이응을 붙여 F에, 지읒과 시옷에 이응을 붙여 J와 Z에 대응하게 하면 어떨까.

글로벌화에 부응할 한글 정책 펼쳐야

세종대왕은 통찰과 창의성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24자로 줄였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 국립국어원은 다양한 외국어를 원발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도록 변화를 주면 어떨까. 외국인이 알파벳 대신 한글을 발음기호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광복80주년 한글날(579돌)을 앞두고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