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한국사회 ‘입틀막 현상’과 데카르트에게 배우는 지혜
과학은 ‘고갱이’다. 불필요한 것은 다 버리고 최소한의 공리체계만 남기기를 추구한다. 수학이 대표적이지만 물리학도 못지 않다. 버려지지 않으려면 탄탄한 논리, 검증과 재현 가능한 실험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서양철학사에 그런 방법으로 버릴 것은 죄다 버린 뒤 살아남은 공리체계로부터 철학을 다시 쌓아올리려 했던 인물이 있다. ‘방법서설’의 저자 데카르트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부록으로 ‘기하학’이라는 수학책을 썼다. 그리스의 기하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철학의 토대를 다시 쌓고 부록 ‘기하학’에서 그리스식 기하학을 대수학의 토대 위에 재구성했다.
‘방법서설’의 완전한 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이끌어, 여러가지 학문(sciences)에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의 서설’이다. 데카르트는 철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체계를 의심의 여지없는 기초 위에 재구성하고자 꿈꾸었던 수학자 과학자였다.
“왜?”는 사라지고 꼰대스러움만 남아
물리학자로 연구실에서만 지내다가 작년 12월 3일 밤 ‘계엄선포’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기괴함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왜?’라는 물음이 사라진 듯 보였다. 젊어서 철학을 했던 사람이 100살이 되면 현인이 되어 믿고 따라야 했고 (왜?) 지위가 높으면 권위도 생겨 따르고 복종해야 했다 (왜?).
지난 여름 어느 학회에 참석했을 때 요즘 미국 이론 물리학계에서 떠오르는 신성으로 인정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를 만났다. 미국 이론 물리학계의 동향과 떠오르는 젊은 과학자의 학문적 성과를 나누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어느 ‘원로’ 학자는 젊은 천재 과학자의 나이를 묻더니 아직 미혼인 젊은이에게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학문적 대화를 이끌기에는 지능도 지식도 쇠퇴해버린 원로가 대화는 반드시 연장자가 주도해야 한다는(왜?) 편견에 갇혀 이럴 때 하나라도 더 묻고 배우려는 많은 후배들의 기회를 앗아갔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세속적 지혜조차 갖추지 못한 슬픈 꼰대의 모습이었다.
최근에 전직 대통령은 독방에서 나오길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난 27년 간 검사였어. 당신 검사해봤어?”로 대신했다. 며칠 뒤엔 국회의원을 다섯번째 한다는 어떤 이가 “초선의원은 아무 것도 모르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유튜브 쇼츠에 올라왔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는 국민적 아픔이 서려 있다. 가라앉는 세월호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꽃봉우리 인생을 마감했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들었던 어른들 말씀이 “가만히 있으라”였다.
젊은 학자라고, 검사를 해본 적이 없다고, 초선의원이라고, 고등학생이라고 입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사회에서 이유불문하고 잘 유통되는 논리다. 하지만 묻고 싶다. 소중한 입을 ‘입틀막’하고 ‘왜?’라는 질문을 금단시하는 권위는 어디서 왔는가? 이미 존재하는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는 정치지만 권위가 애초에 있었는지 질문하는 행위는 과학이다.
지금은 야당이 된 어느 당 국회의원이 들려준 이야기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당의 중진의원이 초선의원을 차례로 불러서 “아무리 그래도 000이 대통령 되는 걸 볼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이유로 탄핵반대 표결을 종용했다고 한다. 양심이 살아 있는 초선의원은 “왜 000이 대통령되면 안 돼요”라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 듯한 이유 정도는 알려줘야 탄핵반대를 할 것 아닌가. 무조건 누구는 안된다고 우기던 그 중진의원은 요즘 각종 비리의혹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다.
개인적 명성과 영향력을 동원해 구명로비라 명명된 정치 로비를 했다는 의심을 받은 유명 목사님들은 자신에 대한 특검의 수사를 교회와 종교에 대한 도전으로 탈바꿈한 설교를 공적인 공간에서 한다. 목사가 곧 종교인 그들에게 교회에서 그런 설교를 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가는 이단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전직 대통령을 보좌하던 경호원이 보여준 ‘입틀막’은 그저 한 편의 가시적 물리적 사례였을 뿐 비가시적 암묵적 입틀막은 사회 곳곳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 던지게 해야
우리 사회에도 중세의 마녀사냥과 면죄부로 상징되는 뒤죽박죽이 된 가치관에서 비롯된 헛말의 향연을 보고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은 모조리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데카르트의 결기가 필요한 때다.
아직 400년 전 데카르트가 찾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버금갈 사회적 공리체계를 찾지는 못했다 해도 적어도 무엇이 공리체계의 일부가 될 수 없는지는 분명하다. 나이는 경험이 아니고, 지위는 지혜와 다르고, 권력은 권위가 아니다.
‘왜?’라고 묻는 자를 구박하거나 입틀막해서는 안된다. 궁금한 게 있을 때 한대 얻어맞을 각오를 하지 않아도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