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상장사 대거 감사인 지정 풀려…회계업계 또 출혈 경쟁 예고
자산 5천억원 이상 82개사 … 외부감사 수임료 덤핑 우려
금감원, 감사품질 하락 ‘경고’ … “감사인 감리 강화할 것”
내년에 중대형 상장사들이 대거 주기적 감사인 지정에서 풀리면서 이들 기업들과 감사계약을 맺으려고 회계법인들이 또 다시 치열한 경쟁을 벌일 전망이다. 올해 ‘제 살 깎아먹기’식 출혈경쟁이 벌어졌던 것보다 더 큰 수임료 덤핑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17일 금융감독원은 2026 사업연도 주기적 지정 등 감사인 지정결과 사전통지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주기적 지정은 506개사, 직권 지정은 724개사로 총 1230개사가 내년에 감사인 지정을 받게 됐다. 주기적 지정은 상장기업과 소유·경영 미분리 대형 비상장사 등이 외부감사인(회계법인)을 6년간 자유 선임했다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내년 신규로 주기적 지정을 받는 상장사는 179개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은 9곳, 5000억원 이상 2조원 미만은 20곳이다.
신규 지정에 비해 내년에 3년의 주기적 지정 기간이 끝나서 외부감사인을 자유롭게 선임할 수 있는 중대형 상장사들은 더 많다. 자산총액 2조원 이상 36개사, 5000억~2조원 미만은 46개사다. 총 82개 중대형 상장사와 신규 감사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회계법인들이 수임 경쟁을 앞두고 있다. 소유·경영미분리 대형 비상장사 63곳도 주기적 지정이 풀리면서 시장에 나오게 된다. 반면 내년에 신규로 주기적 지정이 된 소유·경영미분리 대형 비상장사는 8곳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이 감사인을 직권으로 지정하면 외부감사의 독립성 강화에 따른 감사품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감사투입 시간이 늘고 감사보수가 증가해 기업들이 감사인을 자유롭게 선택할 때와 비교해 감사보수가 상승하는 게 일반적이다. 회계법인간 수임경쟁이 없다는 점도 감사보수가 높게 책정되는 이유다.
하지만 반대로 지정제가 풀리면 그 때부터는 회계법인들이 감사계약을 따내기 위해 감사보수를 낮추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터무니없이 낮은 수임료를 제시해 계약이 체결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감사보수가 30%에서 많게는 50%까지 줄어든 사례들도 나왔다.
감사보수가 낮아지면 감사에 투입하는 인력과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결국 감사품질 하락 가능성이 높다. 올해 대형 회계법인(빅4)들이 덤핑 수주에 뛰어들면서 회계업계 전반적으로 감사보수가 크게 하락하는 일이 벌어졌고, 업계 내부에서는 ‘공멸하는 길로 뛰어들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하지만 출혈경쟁을 막을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게 문제다.
회계법인들이 모여 감사보수를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추지 말자고 하거나 금융당국이 가격에 개입하면 담합 등 공정거래 이슈가 발생한다.
회계법인 대표를 맡고 있는 한 회계사는 “내부적으로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데 달리 방법이 없다”며 “경제 여건이 악화되면서 매출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파트너들에게 덤핑 수주를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회계법인 경영진에서 방침을 내리더라도 실제 감사계약을 수주해야 실적으로 인정받는 파트너 회계사들은 생존이 걸린 문제인 만큼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4일 12개 회계법인 대표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회계법인의 진정한 경쟁력은 단기적 이익보다 감사품질에 기반한 장기적 신뢰를 통해 확보된다”며 “보수 위주의 과도한 경쟁은 감사 투입 인력과 시간의 감소로 이어져 감사품질을 저해하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감사품질 하락은 자본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국내 주식 시장이 이재명 정부 들어서면서 큰 폭의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만 대형 분식회계 사건이나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 사건들이 발생하면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이 원장은 “고의적 분식회계에 가담하거나 이를 묵인·방조한 회계법인은 엄정한 제재로 상응하는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회계법인 중에서 감사시간이 크게 줄어든 곳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감사가 이뤄졌는지 감사인 감리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감사보수 등 가격과 관련된 사안을 당국이 직접 언급할 수는 없지만 감사 시간 감소로 인해 감사품질이 하락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인 감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