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2001년 겨울, 대만 취재의 기억

2025-10-30 13:00:01 게재

14억 중국인들이 쓰는 언어는 같지 않다. 지역별로 천차만별이다. 베이징표준어(普通話)와 상하이 광둥 푸젠 등 다른 지역 언어는 서로 ‘외국어’라고 할 만큼 다르다. 헤어질 때 인사말이 표준어로는 ‘자이지엔(再見)’이지만 상하이 말로는 ‘차이웨이(哉威)’이고, ‘괜찮습니다’를 뜻하는 ‘메이콴시(沒關係)’가 상하이에서는 ‘무마궤이이(姆媽規一)’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4년 전 들른 대만 수도 타이베이의 서점에서였다. 시내 한복판 청핀(誠品)서점의 외국어학습 서적 코너에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주요 외국어 교재가 밀려나고 ‘상하이어(上海話)’ ‘광둥어(廣東話)’ 학습교재가 목 좋은 곳에 배열돼 있었다. 상하이어 교재에는 ‘상하이 진출을 위한 필수준비과정(前進上海 必備課程)’이라고 쓴 띠지까지 둘려있었다.

대만정부 인사들을 만나 왜 그런지를 물었더니 답변이 한결같았다. “대만인들도 중국의 지방언어를 알아야 취업과 승진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기업들 사이에 대륙진출 붐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주요 산업들이 경쟁력을 잃은 채 휘청거리면서 거대한 시장과 낮은 인건비로 무장한 중국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기업들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상하이 광둥 푸젠 등 중국 각지에 진출한 대만 기업인들이 이번에는 ‘언어장벽’에 부딪혔다. 현지 중국인들과 일상적인 대화는 베이징표준어로 나눌 수 있었지만, 현지인들이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는 철저하게 해당지방 언어를 사용해 깊이 있는 관계를 맺기가 어려웠다. ‘진짜친구(펑요우·朋友)’가 돼 사업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현지 언어 습득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만도 ‘추락하는 용’ 시절 겪어

세계 속의 선진경제국가로 도약한 지금의 대만에 설마 그랬던 때가 있었을까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대만의 경제사정은 척박했고 절박했다. 그 시절 대만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산업공동화’와 ‘대륙편입’이었다.

대만정부가 어떻게든 기업들을 붙잡아둬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대륙투자제한법’이란 걸 제정해 엄격하게 적용했지만 ‘살길’을 찾아 무더기로 몰려나가는 기업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포모사 에이서 등 대만을 대표하고 있던 기업들이 국내 공장을 문 닫고 생산기지를 통째 중국으로 옮겼다.

대만의 2001년 3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 4.2%(전년 동기대비)를 기록, 2분기 연속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다. 1년 전 2%대였던 실업률은 5.33%로 뛰어올랐다. 타이베이 최대 번화가(충샤오둥루)에 자리 잡은 초특급호텔 라이라이쉐라톤은 손님이 뚝 끊겨 3개월째 종업원들에게 임금을 못주고 있었다. 그해 12월, 현장을 취재하고 돌아와서 ‘추락하는 용(龍), 고장 난 경제’라는 제목의 기획시리즈 기사를 썼다.

그랬던 대만에 재도약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2016년 진보성향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대만경제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절감한 그는 말이 아닌 실천으로 경제와 민생회복에 최우선 가치와 목표를 두는 실용정책을 펴나갔다. ‘기술이 대만 안보의 보장판’ ‘민간 기업이 일자리 창출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고, 8년 임기 내내 행동으로 옮겼다.

산업단지에 금융·세제·용수·전력·인력 지원을 묶은 패키지 인센티브를 제공한 것, 대학들이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1년이 아니라 6개월마다 한번씩 뽑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로 반도체 기술인재 공급을 해결해낸 것 등은 우파 국민당조차 생각 못한 정책이었다.

이런 파격적 결단은 대만경제에 ‘기적’을 일으켰다. 산업단지 패키지 지원정책을 시행한 지 2년여 만에 중국 등 해외에 나가 있던 209개 기업이 돌아왔고, 6만5000개가 넘는 일자리가 생겼다.

흔히 대만경제가 승승장구하는 요인으로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의 독보적인 활약을 꼽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이 회사 외에도 대만 내 파운드리 2위업체인 UMC와 반도체 설계전문(팹리스)업체 미디어텍, 후공정 분야의 글로벌 1위 기업 ASE테크놀로지 등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기업들이 많다. 특정 기업이 아니라 반도체산업 전반에 걸친 생태계가 탄탄하게 조성돼 있고, 이것이야말로 대만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22년 만에 한국 제친 대만의 저력

이런 생태계 경쟁력의 차이는 한국과 대만의 성장률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올해 성장률이 1%(OECD 전망, IMF 예상치는 0.9%)에 그칠 것으로 예고된 반면 대만은 5%대 초·중반의 고속성장가도를 질주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NI)에서도 올해 22년 만에 한국을 추월하는데 이어 내년에는 4만달러, 2030년에는 5만달러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잇따르고 있다.

2017년 이후 9년째 3만 달러 덫에 빠져있는 한국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24년 전 겨울, 대만경제의 위기를 걱정했던 기록이 민망하고 씁쓸하다.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